항목 ID | GC042100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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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七點山-古典文學 |
영어의미역 | Classical Literature Singing Chiljeom Mountain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강서구 대저동 |
시대 | 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
집필자 | 윤정화 |
[정의]
고려 후기부터 조선 후기에 이르기까지 부산의 칠점산을 대상으로 지은 한시나 산문 등의 문학 작품.
[개설]
부산광역시 강서구 대저동에 있는 칠점산(七點山)은 가락국(駕洛國)의 시조 김수로왕(金首露王)의 장남 거등왕(居登王)과 참시 선인(旵始仙人)과 관련된 전설 속에 등장하는 산이다. 특히 김해 지방에 부임한 관리가 기생에게 준 한시 속에도 등장하는 등 오래 전부터 여러 문헌에 기록되면서 비교적 많은 작품이 전하고 있다. 칠점산은 고려 후기부터 조선 후기까지 지속적으로 시의 소재로 활용되었다. 칠점산을 노래한 한시는 약 25수 이상 전해지고 있다.
[칠점산을 노래한 한시]
칠점산을 주된 소재로 창작한 작품은 고려 때 안축(安軸)[1282~1348]의 「김해칠점산(金海七點山)」을 시작으로 강대수(姜大遂)[1591~1658]의 「칠점산」, 신익황(申益愰)[1672~1722]의 「칠점산」 등 7수가 있다. 또 칠점산 주변의 경관을 읊거나 다른 주제를 표현하기 위한 소재의 일부분으로 언급하고 있는 시에는 박효수(朴孝修)[?~1337]의 「제김해피운루차운(題金海披雲樓次韻)」, 전녹생(田祿生)[1318~1375]의 「증김해기옥섬섬(贈金海妓玉纖纖)」, 정몽주(鄭夢周)[1337~1392]의 「기강렴사(寄姜廉使)」와 「추화기운제우벽상사절(追和其韻題于壁上四絶)」 등 18수 정도가 전한다.
칠점산을 노래한 한시의 내용은 가락국의 거등왕과 칠점산에 살고 있었던 참시 선인과 관련된 전설을 언급하면서 이곳의 아름다운 자연 경관을 읊은 작품이 많다. 칠점산의 수려한 경치를 노래한 한시 중에서 가장 오래된 작품은 다음 안축의 시이다.
1. 안축의 「김해칠점산(金海七點山)」
해문천리수부공(海門千里水浮空)[바다 문 천리에 물이 하늘에 떠 있으니]
칠점청봉묘애중(七點靑峯杳靄中)[일곱 점 푸른 봉우리 안개 속에 아득하네]
차시금선서식처(此是琴仙捿息處)[이곳이 바로 금선이 살던 곳]
승주차막과총총(乘舟且莫過悤悤)[배 타고 가는 길 총총히 하지 말게].
이 작품에서 시의 화자는 거문고를 타고 놀았던 참시 선인이 살았을 만큼 아름다운 칠점산 주변의 경치를 감상할 수 있도록 배를 느긋하게 운행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또한 전체적으로 작품은 광활하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2. 전녹생의 「김해 기녀 옥섬섬에게 바친다[贈金海妓玉纖纖]」
해상선산칠점청(海上仙山七點靑)[바다 위 신선의 산 칠점이 푸르고]
금중소월일륜명(琴中素月一輪明)[가야금 속 흰 달은 일륜이 밝아라]
세간불유섬섬수(世間不有纖纖手)[세상에 옥섬섬의 손이 없었다면]
수긍능탄태고정(誰肯能彈太古情)[누가 태고의 마음을 타보려 했겠는가].
고려 후기의 문인 전녹생은 김해 기생 옥섬섬(玉纖纖)과 사랑을 나누고 시를 주었던 적이 있다. 정몽주의 『포은집(圃隱集)』에 보면 “옛날 재상(宰相) 야은(埜隱) 전선생(田先生)이 계림 판관(鷄林判官)이었을 때 김해 기생 옥섬섬에게 시를 주었다.”라고 하면서 그 시를 소개한 후 10여 년 뒤에 전녹생이 다시 왔을 때 옥섬섬은 이미 늙었지만 그가 불러 곁에 두고 매일 가야금을 타게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전녹생과 기생 옥섬섬과의 사랑 이야기는 널리 회자(膾炙)되어 여러 문집에 기록이 전할 뿐 아니라 정몽주, 송희경(宋希璟) 등의 차운시(次韻詩)가 남아 있다. 전녹생이 옥섬섬에 주었다는 시에 칠점산이 등장한다.
「김해 기녀 옥섬섬에게 바친다」에서 화자는 칠점산을 바다 위의 신선의 산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곳이 참시 선인이 살던 곳이기도 하지만 그 만큼 칠점산의 경관이 빼어났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푸른 칠점산과 흰 달을 배경으로 옥섬섬이 가야금을 연주하는 아름다운 모습이 연상된다.
3. 정몽주의 「화운하여 네 수를 벽에 적다(追和其韻題于壁上四絶)」
칠점산전모노횡(七點山前暮露橫)[칠점산 앞에 안개 아지랑이 비끼고]
삼차포구녹파생(三叉浦口綠波生)[삼차포 어귀에는 푸른 물결 일도다]
춘풍이월금주객(春風二月金州客)[봄바람 부는 이월 금주에 온 길손은]
정사강남로상행(正似江南路上行)[강남 길을 가던 때와 정말 같구나].
칠점산을 노래한 한시들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바로 정몽주가 지은 이 작품이다. 「화운하여 네 수를 벽에 적다」에는 칠점산과 삼차강(三叉江)이 등장하고 있는데, 길손으로서 느끼는 칠점산과 삼차강에 찾아온 봄기운을 잘 드러내고 있다. 여기서는 참시 선인이나 옥섬섬과 관련된 내용이 없고, 칠점산과 주변의 경관과 그 속에서 경험한 화자의 감회를 표현하고 있다.
[칠점산을 노래한 산문]
칠점산은 조선의 대표적인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일곱 봉우리의 산이 점과 같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 지은 것이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가락국 때 참시 선인[가락국 거등왕 때의 도사]이 놀던 곳이라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칠점산과 주변의 경치에 관한 보다 자세한 기록은 이만부(李萬敷)[1664~1732]의 『식산집(息山集)』, 조명채(曺命采)[1700~1764]의 『봉사일본시문견록(奉使日本時聞見錄)』에 나타나 있다.
칠점산과 가락국의 참시 선인과 관련된 「초현대(招賢臺) 전설」은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안정복(安鼎福)[1712~1791]의 『동사강목(東史綱目)』 등에 각각 실려 있다. 「초현대 전설」은 “칠점산에 참시 선인이 살고 있었는데, 금관가야 때 수로왕의 아들 가락국 2대 왕인 거등왕이 초현대를 짓고 참시 선인을 그곳으로 초청하여 국정 자문과 바둑을 두기도 하고, 초현대에서 배를 띄워 놓고 그의 거문고 연주를 듣기도 했으며, 왕이 앉았던 연화석(蓮花石)과 바둑판 돌은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고 한다. 이 전설을 통해 칠점산은 이미 가락국 시절부터 신선이 살 정도로 뛰어난 선경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칠점산이 ‘가락국 때 참시 선인이 놀던 곳’, ‘거등왕이 참시 선인을 초빙해서 국사를 논의했던 곳’이라는 점으로 미뤄 보면 칠점산은 도교에서 말하는 신선 세계로 유추해 볼 수 있다.
[의의와 평가]
칠점산은 가락국 때부터 부산과 함께 한 유서 깊은 산 가운데 하나로 여러 문헌에 관련 기록이 전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 아름다움과 신비로움을 노래하였다. 하지만 근대 이후 낙동강 제방 축조 공사와 해군 군용 비행장 건설 및 김해 비행장 확장 공사 등으로 인해 칠점산은 거의 깎여 나가고, 지금은 칠점 가운데 하나도 온전히 남아 있지 않은 안타까운 상태에 놓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