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0070 |
---|---|
한자 | 忠烈祠-古典文學 |
영어의미역 | Classical Literature Singing Chungnyeolsa Temple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동래구 충렬대로 345[안락동 838]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윤정화 |
[정의]
부산의 충렬사를 대상으로 지은 조선 시대의 한시나 산문 등 문학 작품.
[개설]
충렬사(忠烈祠)는 임진왜란 때 왜적과 싸우다 돌아가신 분들의 위패를 모신 엄숙한 사당이다. 충렬사에는 현재 동래 부사 송상현(宋象賢)[1551~1592], 부산진 첨사 정발(鄭撥)[1553~1592], 양산 군수 조영규(趙英圭)[?~1592], 동래 향교 교수 노개방(盧蓋邦)[1563~1592], 유생 문덕겸(文德謙)·양조한(梁潮漢), 다대포 첨사 윤흥신(尹興信)[?~1592] 등 수많은 순국선열의 영령을 모셔 놓았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1605년(선조 38) 동래 부사로 온 윤훤(尹暄)[1573~1627]이 송상현을 모시는 송공사(宋公祠)를 세워 위패를 모시고 매년 제사를 지냈다. 인조(仁祖)는 재위 초기에 이곳을 ‘충렬(忠烈)’이라 이름하고 그 충성에 보답하였다. 1651년(효종 2) 동래 부사로 온 윤문거(尹文擧)[1606~1672]는 좁은 송공사를 안타깝게 여겨서 이를 안락리에 옮겨 안락 서원(安樂書院)을 세워 유생을 모아 교육하고 선열에 대한 제사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조선 후기에 안락 서원은 선열에 대한 제사와 교육을 병행한 곳이었지만 지금은 임진왜란 때 돌아가신 선열에 대한 제사를 지내는 사당, 곧 ‘충렬사’의 모습만 확대되어 남아 있다. 1976년부터 1978년까지 중수와 보수 공사를 하여 임진왜란 당시 동래성 전투와 관련된 기념관을 세워 유물과 그림을 전시하고 있다.
이처럼 충렬사는 임진왜란 당시 직접 전투가 있었고, 그때 순국한 선열들의 위패를 모신 곳이기 때문에 그들의 업적과 충성심을 기리는 한시·전 등을 비롯하여 충렬사와 관련된 한시와 산문 등이 다양하게 전하고 있다.
[충렬사와 관련된 한시]
충렬사와 관련된 한시에는 동래 전투에서 순절한 인물들의 충절을 기리는 작품이 가장 많이 남아 있다. 동래 부사 윤훤의 「충렬사」, 이안눌(李安訥)[1571~1637]의 「동래맹하유감(東萊孟夏有感)」, 접위관 이정제(李廷濟)[1670~1737]의 「충렬사」, 권이진(權以鎭)[1668~1734]의 「충렬사」, 이정신(李正臣)[1660~1727]의 「충렬사」, 양산 군수 김환의 「충렬사」 등에서 볼 수 있다.
특히 임진왜란이 끝난 뒤 1605년(선조 38) 동래 부사로 온 윤훤은 송상현 부사를 모시는 송공사를 세워 위패를 모시고 매년 제사를 지냈는데, 그의 한시에는 송상현의 충절뿐만 아니라 첩실로 따라왔던 금섬(金蟾)의 의기가 가상하다고 하였다. 1608년(광해군 즉위) 동래 부사로 부임하여 송공사에 처음 기제를 거행하고 올린 이안눌의 한시 「동래맹하유감」에 당시의 정황과 백성들의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1. 이원진의 「제송공사(題宋公祀)」
충렬당당우주수(忠烈堂堂宇宙垂)[충렬을 당당하게 우주에 드리우니]
후조송백세한지(後凋松柏歲寒知)[세한(歲寒) 후에 송백(松柏)의 절개를 알 수 있도다]
허장재개연쌍묘(許張在皆聯雙廟)[옛적에 허원(許遠)과 장순(張巡)은 쌍묘(雙廟)를 연(聯)했는데]
송정여금공일사(宋鄭如今共一祠)[지금에 송공(宋公)과 정공(鄭公)은 일사(一祀)로 함께 하였도다]
일월고현순국절(日月高懸殉國節)[일월은 높이 순국(殉國)의 절(節)을 걸었는데]
풍운장대살신비(風雲長帶殺身悲)[풍운(風雲)은 길이 살신(殺身)의 슬픔을 띠었도다]
무론기작산하장(無論氣作山河壯)[기(氣)가 산하(山河)를 이루어 장(壯)하다고 논하지 말라]
백세삼한게병이(百世三韓揭秉彛)[백세토록 삼한(三韓)에 이윤(彛倫)을 빛나게 하리라].
동래 부사 이원진(李元鎭)[1594~1665]이 송공사를 제향한 후 「제송공사」를 창작하였다. 이원진은 송상현과 정발의 절개를 세한 후에 더욱 빛나는 소나무·잣나무 등에 빗대어 높이 평가하였다. 당나라 현종 때 안녹산의 난이 일어났을 때 끝까지 수양성(睢陽城)을 지켰던 허원과 장순은 쌍 묘를 썼지만, 송공과 정공은 함께 배향되고 있다고 하였다. 송공과 정공이 순국의 절개를 지킴으로써 살신의 슬픔을 띠었지만 이윤, 즉 온 나라에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떳떳한 도리(道理)를 빛나게 했다는 것이다. 이 시에서는 두 사람이 송공사에 배향될 충분한 자격이 있으며, 그들의 충정과 절개가 길이 전해질 것임을 밝히고 있다.
2. 정항중의 「충렬사를 첨배(瞻拜)하고 느낌이 있어 읊는다[瞻拜忠烈祠感吟]」
첨배사전체자방(瞻拜祠前涕自滂)[사전(祀前)에 첨배(瞻拜)*하매 눈물이 절로 쏟아지나니]
양공신위엄성행(兩公神位儼成行)[양공(兩公)의 신위(神位)는 엄연히 행렬(行列)을 이루었도다]
부성대절추상렬(釜城大節秋霜烈)[부산성(釜山城)의 대절(大節)은 추상(秋霜)과 같이 열렬(烈烈)하고]
내부정충백일광(萊府貞忠白日光)[동래부(東萊府) 정충(貞忠)은 태양과 같이 밝도다]
웅장취시명의리(熊掌取時明義理)[웅장(熊掌)을 취할 때 의리(義理)를 밝히고]
홍모연처수강상(鴻毛捐處樹綱常)[홍모(鴻毛)가 떨어지는 곳에 강상(綱常)을 세웠도다]
적래적거성인지(適來適去成仁地)[양공(兩公)의 성인(成仁)한 곳에 잠깐 왔다가 돌아가는데]
다사우금경봉향(多士于今敬奉香)[지금도 많은 사자(士子)들이 공손히 향화(香火)를 받들고 있도다].
*첨배(瞻拜): 선현의 묘소나 사당에 우러러 절함.
이 시는 충장공 정발의 현손(玄孫)[증손자의 아들] 정항중(鄭恒重)의 작품으로, 충렬사를 배알하고 난 뒤의 감회를 노래하고 있다. 정항중은 이 작품에서 송상현과 정발의 절개와 충성을 ‘웅장’과 ‘홍모’에 빗대어 표현하고 있다. 이 두 사람은 웅장[곰의 발바닥], 즉 좋은 것을 취할 때 의리를 밝혔으며, 홍모[기러기의 털], 즉 매우 가벼운 사물이 떨어지는 곳에서 사람의 도리를 세웠다는 것이다. 정항중 자신은 이 두 사람이 인(仁)을 이룬 곳에 잠깐 왔다가 돌아가지만 지금도 많은 선비들이 공손히 배향하고 있음을 밝힘으로써, 충렬사에 양 공을 기리는 추모의 행렬이 끊이지 않음을 시사하고 있다.
[충렬사와 관련된 산문]
충렬사와 관련된 산문에는 조선 중기 학자 신흠(申欽)[1566~1628]이 쓴 「송동래전(宋東萊傳)」이 있다. 「송동래전」은 송상현의 일대기를 비롯하여, 공의 사후 벼슬이 내려지고 시신을 고향으로 옮긴 후 사당을 세워 제사를 모시게 된 경위를 자세히 서술해 놓았다.
또 1652년(효종 3) 유계(兪棨)[1607~1664]가 지은 「사우개건기(祠宇改建記)」에는 조선 효종 때 동래 부사로 부임했던 윤문거(尹文擧)[1606~1672]가 성내에 있던 충렬사를 헐고 지금의 자리로 옮기면서 안락 서원을 창건한 과정을 기술하고 있다.
동래성 전투를 기록한 것으로는 송시열(宋時烈)[1607~1689]이 기술한 「동래남문비기(東萊南門碑記)」가 있다. 「동래남문비(東萊南門碑)」는 1668년에 송준길(宋浚吉)[1606~1672]이 글을 썼으며, 이정영(李正英)[1616~1686]이 전자(篆字)[한자 서체의 한 종류]를 써서 1607년(선조 40) 당시의 격전지였던 남문 밖 농주산(弄珠山)에 세운 것이다. 「동래남문비기」에도 임진왜란 당시의 급박했던 상황과 순직한 인물들의 의로운 죽음에 대해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1709년(숙종 35) 동래 부사로 부임한 권이진(權以鎭)[1668~1734]은 동래 부사 정석(鄭晳)[1619~1677]이 남긴 송부사의 순절도(殉節圖)에 대한 설명을 붙인 「화기(畵記)」를 남겨 그림을 설명하면서 공의 충성심을 예찬하였다. 또한 권이진이 충렬사와 별도의 사당에 모시고 있던 문덕겸·김희수(金希壽)·신여로(申汝櫓) 등을 제사 지내고 있었는데, 이 별사(別祠)에 사액(賜額)을 청하는 장계(狀啓)를 올린 것이 전하고 있다. 이외에도 충렬사에 모신 분들의 제사를 지낼 때 읽었던 제문(祭文)들도 다수 남아 전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부산은 임진왜란 당시 국가의 관문이자 일본군과 첫 전투지였고, 그 피해도 컸다. 이때 나라를 위해 희생되었던 송상현 부사를 비롯한 순국 영령들은 부산을 충렬의 고장으로 명성을 드높이고 부산을 빛낸 대표적 인물이 되었다. 이들의 영령을 모신 충렬사는 부산의 대표적인 명소이자 충절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충렬사는 선열의 숭고한 뜻을 기리고 후손들에게 애국심을 심어 주는 소중한 곳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