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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남정을 노래한 고전 문학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0067
한자 鎭南亭-古典文學
영어의미역 Classical Literature Singing Jinam-jeong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동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박양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680년 - 동래 부사 이복(李馥) 시 창작
특기 사항 시기/일시 1737년 - 접위관 최종주(崔宗周) 시 창작
1723년 - 순무어사 유수(柳綏) 시 창작
관련 장소 진남정 - 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동

[정의]

조선 후기 부산의 진남정을 대상으로 지은 한시 작품.

[개설]

진남정(鎭南亭)은 다대포성 내에 있었던 정자이다. 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동에 있던 진남정은 1730년 6월에 중수되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소실되어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동래 부사를 비롯하여 접위관(接慰官), 순무어사(巡撫御使) 등이 부산에 들렀을 때 진남정에 올라서 정자를 비롯한 주변 경관을 읊은 시가 세 편이 남아 있다.

[진남정을 노래한 한시]

1. 이복의 시

소소문다대(少小聞多大)[젊어서 다대에 대해 들어보았는데]

금래자세간(今來仔細看)[지금 와서 자세히 보노라]

개귀천하수(皆歸天下水)[모든 것이 천하의 물로 돌아가니]

부진해중산(不盡海中山)[바다 가운데 산은 다함이 없다]

용작선쌍도(龍雀船雙道)[용작(龍雀)을 그린 배는 두 길이요]

단청옥수간(丹靑屋數間)[단청을 칠한 집은 몇 간이네]

주인유객고(主人留客苦)[주인은 객고를 생각하여 만류하는데]

음사주단란(飮射做團欒)[술 마시고 활 쏘며 친밀하게 노니는구려].

이 시는 이복(李馥)[1625~1688]이 1680년 여름에 진남정에 대하여 읊은 작품이다. 이복은 1676년(숙종 2) 동래 부사로 부임하였다가 3년 만기를 채우고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진출하였다. 이 시는 경신년 1680년(숙종 6)에 지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주인은 객고를 생각하여 만류하는데”라는 구절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가 서울로 돌아가기 직전에 진남정에서 신임 동래 부사와 연회를 하며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진남정의 위치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으나 “용작을 그린 배는 두 길이요, 단청을 칠한 집은 몇 간이네”라는 구절이 있는 것으로 보아 진남정에서는 멀리 바다와 그 바다 위의 배가 훤히 내려다보인 것을 알 수 있다.

2. 최종주의 시

남래관람종감과(南來觀覽縱堪誇)[남쪽에 와서 늘어선 자랑거리들을 관람하니]

안마기여만리하(鞍馬其如万里遐)[말안장을 얹던 곳과는 만 리로 멀어졌구나]

삼도파성훤의침(三島波聲喧倚枕)[삼도(三島)의 파도 소리 시끄러워 베개에 기대었더니]

백만운기요정거(百蠻雲氣繞停車)[백만(百蠻)[남쪽 오랑캐]의 운기(雲氣)가 감싸 수레를 멈추는구나]

향수화수혼성몽(鄕愁和睡渾成夢)[고향 생각은 잠과 어우러져 꿈을 이루니]

객빈봉춘반욕화(客鬂逢春半欲華)[객의 귀밑 터럭은 봄을 만나 반쯤 하얗게 되려 하네]

명일등대간출일(明日登臺看出日)[밝은 날 높은 대에 올라 해 돋는 것을 보리니]

일변귀사전응가(日邊歸思轉應加)[해 돋는 변방이라 고향 돌아갈 생각은 응당 더하겠지].

최종주(崔宗周)[1683~1737]는 1717년(숙종 43)과 1737년(영조 13) 두 차례 접위관으로 임명되었다. 이 시는 1737년 접위관으로 동래에 왔을 때 지은 작품이다. 이 시에서는 임무를 맡은 벼슬아치로서의 마음가짐과 함께 나이든 몸으로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오게 된 괴로움이 동시에 드러나 있다. 특히 “해 돋는 변방이라 고향 돌아갈 생각은 응당 더하겠지.”라는 마지막 구절은 나그네의 괴로움이 잘 드러난다고 하겠다. 이는 앞서 살핀 이복의 시에 나타난 “술 마시고 활 쏘며 친밀하게 노니는구려.”의 내용과는 상반된다. 이복의 경우 부사의 직을 무사히 마치고 서울로 가면서 진남정에 들렸고, 최종주의 경우 접위관으로 동래에 내려와 진남정에 들렀기 때문에 이러한 차이가 생긴 것으로 보인다.

3. 유수의 시

승륜북궐향남주(承綸北闕向南州)[북쪽 대궐에서 왕명 받들고 남쪽 고을로 향하였는데]

출역행장임현유(出役行藏任顯幽)[어사로 맡은 일 나섬과 숨음에서 현달과 유폐가 달려 있구나]

우리운하임소도(雨裏雲霞臨小島)[비 오는 가운데 구름과 노을은 작은 섬에 임하였는데]

악중규화핍양주(幄中規畫乏良籌)[장막 중에서 계략을 세움에 좋은 대책이 나질 않네]

충파화함삼성각(衝波畵艦三聲角)[파도와 충돌하는 화려한 전함에서는 호각 소리 세 번 울리고]

요석홍장백척루(繞席紅粧百尺樓)[좌석을 휘감은 붉은 단장은 백 척의 누각에 있구나]

다사주인유객의(多謝主人留客意)[주인이 객을 만류하는 뜻은 감사하나]

동산하독천풍류(東山何獨擅風流)[동산은 어찌하여 혼자서 풍류를 마음껏 즐기는가].

이는 유수(柳綏)[1678~?]가 1723년(경종 3) 삼남 순무어사로 파견되어 동래에 왔다가 진남정에 올라 노래한 시이다. 산으로 온 유수는 “어사로 맡은 일 나섬과 숨음에서 현달과 유폐가 달려 있구나.”라며 자신의 태도를 정하였으나 “장막 중에서 계략을 세움에 좋은 대책이 나질 않네.”라며 괴로움을 토로하고 있다. 이러한 객고를 위로해 준 것이 아마도 진남정에서의 풍류였던 것으로 보인다. “파도와 충돌하는 화려한 전함에서는 호각 소리 세 번 울리고, 좌석을 휘감은 붉은 단장은 백 척의 누각에 있구나.”라는 구절을 통해 진남정에서 보이는 바다 풍경과 당시 붉은 단장으로 장식된 정자의 아름다움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의의와 평가]

진남정은 현재 소실되어 그 형태를 알 수 없으나, 지금까지 남겨진 고전 문학을 통해 당시 진남정이 부산 지역에서도 유명한 누각이었음을 짐작하게 해 준다. 특히 이들 시 속에 풍류를 즐겼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임무를 맡아 동래로 내려오는 관인들이 즐기던 연회의 장소였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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