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006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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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靖遠樓-古典文學 |
영어의미역 | Classical Literature Singing Jeongwon-ru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동래구 충렬대로 237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이현호 |
[정의]
조선 시대 부산의 정원루를 대상으로 지은 한시나 산문 등의 문학 작품.
[개설]
정원루(靖遠樓)는 1446년(세종 28) 동래부 객사 안에 세워져 도도하게 아름답던 누각이다. 왜군의 침략에 대응하다 순절한 부사 송상현(宋象賢)[1551~1592]과 군민들이 항전하는 동래성 전투의 전모를 그린 「동래부 순절도(東萊府殉節圖)」에 묘사되어 있는 정원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 정도로 보인다. 임진왜란 때 불탄 후 원래 자리에 지금의 송공단(宋公壇)[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 229-78번지]이 자리하고 있어, 1708년(숙종 34)에 동래 부사 한배하(韓配夏)[1650~1722]에 의하여 동래부 객사의 담 바깥쪽 남쪽[동래부 동헌의 서쪽]에 중건되었다. 중건될 때 건물의 규모가 커져서 정면 5칸에 측면 2칸의 총 10칸 규모의 누각이 되었다. 이후 일제 강점기 때 유실된 것으로 추정될 뿐 정확한 훼상 연도 및 과정 등은 불분명하다.
[정원루와 관련된 산문]
정원루에 대해서는 조선 전기 신숙주(申叔舟)[1417~1475]의 「동래현성문루기(東萊縣城門樓記)」에서 누각이 세워진 경위와 연대를 상세히 알 수 있다.
병인년(1446) 여름에 선산(善山)의 김후(金侯)가 이 고을에 오자, 수개월도 지나지 않아 온갖 허물어졌던 것들이 모두 다시 일으켜 세워지게 되었다. 성터 넓히기를 청하고 성의 북문에 누대(樓臺)를 세웠는데, 다섯 개의 기둥이었다. 화려하지도 누추하지도 않았고, 규모가 알맞게 되어 있었다. 내가 선위사(宣慰使)로 왕명을 받들고 와서 김후와 같이 올라가 보니, 지세가 매우 높은 곳도 아니면서 상쾌하고 후련하기가 특이하여, 사방이 훤하게 트이고 전망은 막히는 것이 없어 함께 보며 즐겼다. 김후가 분부하기를, 누대가 이루어진지 5년(1451)이 되었다. 그러나 편액과 기문(記文)이 없어 바라던 바가 있을 법하니 좋은 이름으로 편액을 짓고, 기록을 대강 써 달라고 청하기에 사양하다가 하는 수 없이 말한다.
이 기문을 통하여 정원루는 1446년 동래에 부임한 김시로(金時露)에 의해서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정원루는 본래 기둥이 사방 네 개와 중앙의 한 개로 이루어진 이층 건물로 언덕 위에 지어졌다. 정원루 주변으로는 관청 건물들이 있을 뿐 사방이 툭 틔어 있는 데다 이층이어서 주위의 자연 경관을 잘 바라볼 수 있었다. 정원루라는 이름은 남쪽 먼 곳[원(遠)]에 있는 일본을 다스린다[정(靖)]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
[정원루를 노래한 한시]
1. 김종직의 「동래 정원루의 운에 화답하다(和東萊靖遠樓)」
천심누로음원연(千尋樓櫓蔭垣堧)[천 길 누각은 담장으로 둘려졌고]
신채환미창해변(蜃彩還迷漲海邊)[신기루는 다시 바닷가에 아른거리네]
비예야전한수각(睥睨夜傳寒戍角)[어둑한 성가퀴엔 군영의 뿔피리 소리]
난간춘창고인연(欄干春敞故人筵)[봄날 난간엔 친구의 주연 자리]
청소사절쟁첨준(靑霄使節爭瞻峻)[하늘같은 사신 우뚝한 누각 올려보곤]
황요병주불핍현(荒徼兵籌不乏賢)[변방 수비에 현명함 부족하다 여기지 않네]
이도견과유막부(二度見瓜猶幕府)[두 해 동안 막부에 있었으니]
주배수분차도연(酒盃隨分且陶然)[술잔 서로 나누며 흥을 돋우노라].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1431~1492]이 지은 이 시는 정원루와 주위의 풍경, 고요한 봄밤 잔치 자리, 정원루의 웅장함, 손님을 맞이하며 연회를 베풀고 술을 함께 마시는 즐거움을 표현하고 있다. 「동래 정원루의 운에 화답하다」는 무오사화를 일으켜 김종직을 부관참시(剖棺斬屍)[죽은 뒤에 큰 죄가 드러난 사람을 극형에 처하던 일]했던 이극돈(李克墩)[1435~1503]이 김종직에게 청한 시다. 그렇기에 제일 마지막 구절은 시를 청한 이극돈에게 의례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2. 김성일, 「즉석에서 정원루에 걸려 있는 조태허(曺太虛)의 시운을 차운하여 좌우에 있는 사람들에게 바치다(卽席次靖遠樓曺太虛韻呈左右)」
봉원형승칭가명(蓬原形勝稱佳名)[봉원 땅 형승이야 아름답다 칭하거니]
입립봉만해상청(立立峯巒海上靑)[삐죽삐죽 솟은 산들 바닷가에 푸르네]
정원누고표옥적(靖遠樓高飄玉篴)[정원루라 누각 높아 옥적 소리 울려오고]
해운대형강선령(海雲臺迥降仙靈)[해운대라 아득히 멀어 신선이 내려오네]
천유직욕능삼도(天遊直欲凌三島)[하늘 날아 삼도 위로 솟구치고 싶거니와]
별주응수도팔명(別酒應須倒八溟)[이별 술잔 내 응당 온 바다를 다 들이키리]
만곡룡양영아거(萬斛龍驤迎我去)[만곡 싣는 용양이 나를 맞아 가나니]
□□하용가운령)(□□何用假雲翎)[구름 빌려 탈 필요 뭐 있으랴].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1538~1594]이 지은 이 시 제목에 등장하는 태허(太虛)는 조위(曺偉)의 자(字)다. 사람들에게 아름답다 일컬어지는 동래의 형승(形勝)은 산과 바다의 푸름 속에 처해 있다. 여기서 높은 정원루에 옥피리 소리 울려 신선이 내려올 듯하니, 자신은 삼신산(三神山)인 삼도(三島) 위로 올라 신선이 되어 바다를 다 들이킬 듯하다고 하였다. 용양(龍驤)은, 진(晉) 나라 용양 장군(龍驤將軍) 왕준(王濬)이 오(吳)나라를 정벌할 적에 일찍이 큰 배를 만들어서 정벌하였다는 고사(故事)에서 온 것으로, 곧 큰 배를 가리킨다. 정원루에서 신선이 된 듯한 느낌을 희학적으로 표현하였다.
3. 오명서의 「정원루(靖遠樓)」
가원망난득(家遠望難得)[집이 멀어 바라보기조차 어려워]
등루의사통(登樓意乍通)[누각에 오르니 마음 문뜩 시원하네]
과춘유호객(過春留好客)[지나는 봄 머무르는 반가운 손님]
간월좌원융(看月坐元戎)[달 바라보며 앉아있는 군사들]
읍리금가내(邑里琴歌內)[고을의 거문고와 노랫소리 속에]
풍년계견중(豊年鷄犬中)[풍년 든 민가와 민가 속에]
도화락이진(桃花落已盡)[복사꽃 모두 다 떨어졌는데]
하사우동풍(何事又東風)[어인 일로 또 봄바람인가].
동래 부사를 지냈던 오명서(吳命瑞)[1688~1740]가 지방관으로 내려와 느끼는 고향에 대한 향수를 전망 좋은 정원루에서 달래고 있다. 자신은 봄에 누각에 머물러 있고, 군사들은 편히 앉아서 달을 바라보고 있다. 정원루 주위의 경관을 평화롭게 읊고 있다. 평화로움은 풍년으로까지 이어져 거문고 노랫소리 흐르고 집집마다 닭과 개 짓는 소리 서로 이어진다. 풍년이라 추수하는 가을에, 복사꽃은 진작 졌지만 따스한 봄바람이 다시금 불어온다는 데서 부산의 따스한 기후를 느끼게 한다.
[의의와 평가]
부산 동래에 있었던 정원루는 높은 누각과 탁 트인 전망으로 인해, 정원루를 노래한 고전 문학은 대체로 연회, 신선, 평화, 따스함 같은 이미지로 이루어져 있다. 밝고 긍정적인 이미지로 고전 문학의 작품 세계가 이루어진 까닭은, 지방관의 그리움을 해소할 수 있을 정도의 높고 시원한 전망과 우뚝 솟은 정원루의 건물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인다. 정원루는 단순히 일개 누각이 아니라, 부산 지역에 부임한 지방관이 객지 생활에서 생기는 그리움과 회포를 긍정적으로 승화시키는 장소였다는 데에서 고전 문학의 의의를 찾을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