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00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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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慍井-古典文學 |
영어의미역 | Classical Literature Singing Onjeong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동 |
시대 | 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
집필자 | 이현호 |
[정의]
고려 후기에서 조선 후기에 이르기까지 부산의 온정을 대상으로 지은 한시 작품.
[개설]
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동에 있는 온정(慍井)[땅속에서 따뜻한 물이 솟는 우물]에 대하여 「백학과 동래 온천」이라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신라 시대 때 다리를 쓰지 못하는 노파가 온정 부근에 살고 있었는데, 마침 절룩거리는 백록이 나타나 소하정 주위를 배회하더니 사흘 만에 완쾌되는 것을 보고 신기하여 노파도 절룩거리는 다리에 몇 십 번이고 샘물을 찍어 발랐더니 다리가 자유롭게 되어 마침내 온정이 알려졌다고 하였다.
문헌 기록상으로는 신라의 재상이었던 충원공(忠元公)이 온정에서 목욕을 하고 돌아갔다는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기사가 가장 이른 시기의 기록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과 『동래부지(東萊府誌)』의 「산천조(山川條)」에서도 “온정이 부의 북쪽 5리에 있는데 그 열이 계란을 익힐 만하고, 병자(病者)가 이곳에서 목욕을 하면 문득 나아서 신라 시대에는 왕이 여러 번 이곳에 행차하였다.”고 하였다.
정구(鄭逑)[1543~1620]는 『봉산욕행록(蓬山浴行錄)』에서, “샘의 안팎에 석감(石龕)이 있는데 하나의 감(龕)에 5~6명이 들어갈 수 있고, 샘물은 위쪽 많은 구멍에서 흘러나오는데 그 물은 매우 뜨거워 갑자기 손발을 넣을 수가 없다.”고 하였다. 이로써 본다면 온정은 두 석조에 10여 명 정도가 목욕할 수 있는 작은 규모였고, 온천물의 수온은 매우 높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후 강필리(姜必履)[1713~1767]에 의해 개건된 온정은 “돌로 탕 두 개를 만들고 아홉 칸의 욕사(浴舍)를 지었는데 남탕과 여탕을 구분하고 지붕을 덮었다.”고 하였다. 이 이후에도 온정은 여러 차례 중수되었다.
[온정을 노래한 한시]
고려조 문인인 고중지(高中址)는 오언 고시(五言古詩) 「송최함일직랑출안경상(送崔咸一直郞出按慶尙)[경상도를 안찰하러 나가는 최함일 직랑을 보내며]」에서 동래의 경승과 고적을 찬송하였는데, 금정산을 묘사한 다음에 온정[7행~10행]을 바로 언급하고 있다.
백일운기증(白日雲氣蒸)[한낮에 뜨거운 김 무럭무럭]
탕천용산곡(湯川湧山谷)[온천물 골짜기에 용솟음치니]
행려관기방(行旅館其傍)[나그네들 그 곁에 묵어가면서]
방동득수목(方冬得漱沐)[겨울에도 목욕을 할 수 있지요].
고중지는 따뜻한 물이 계속 넘쳐나 한겨울에 나그네들이 야외에서 목욕하는 이국적인 온정의 풍치를 노래하였다.
온정을 읊조린 시들 중에서 가장 상세한 것은 다음의 박효수(朴孝修)[?~1377]가 지은 시로, 입욕(入浴) 과정을 잘 드러내고 있다.
동방심처개석당(洞房深處開石塘)[골방 깊은 곳에 돌 연못을 열어서]
정양일곡영왕왕(淨漾一斛盈汪汪)[맑은 물 열섬들이 수조에 늠실늠실]
심가제요근이척(深可齊腰僅二尺)[깊이는 두 자쯤 허리에 겨우 차고]
온연난무증기방(慍烟暖霧蒸其傍)[따뜻한 김 뭉게뭉게 그 곁에 피어난다]
화촉홍등조수저(畵燭紅燈照水底)[그린 촛불 붉은 등불 물밑을 비추고]
반선향수부입탕(半揎香袖扶入湯)[소매 걷은 여인네가 부축하여 탕에 들어]
괴번섬수세태배(愧煩纖手洗鮐背)[부끄럽다 섬섬옥수로 늙은 등을 씻어 주니]
구니린갑소설상(垢膩鱗甲消雪霜)[비늘같이 찌든 때가 눈처럼 사그라지네]
쾌여마고파료처(快如麻姑爬療處)[마고할미 가려운 곳 긁듯 시원도 하고]
열한발면류청장(熱汗發面流淸漿)[얼굴에 더운 땀이 줄줄이 흘러내리네]
욕파서서식백건(浴罷徐徐拭白巾)[목욕 끝나 서서히 수건으로 닦고서]
희발퇴연와일상(唏髮頹然臥一床)[머리 말리려 침상 하나에 벌렁 누우니]
신경골상약환수(身輕骨爽若換髓)[골수를 바꿔 낸 듯 몸도 뼈도 가벼워]
하선표표학배상(何羨飄飄鶴背翔)[훌쩍 학을 타고 신선됨을 부러워하리]
돈망신세득감침(頓忘身世得甘寢)[몸과 세상 모두 잊고 달콤한 잠을 자니]
황홀몽유무하향(恍惚夢遊無何鄕)[황홀한 꿈속에서 무하향에 노닐어라]
각후환위행로객(覺後還爲行路客)[깨어나선 되돌려 길가는 손이 되면]
역기진토오의상(驛騎塵土汚衣裳)[역로의 먼지로 옷을 더럽히리니].
이 시를 보면 깊이 두 자 정도, 열 섬 가량의 물이 들어가는 수조(水曹)[물을 담는 통]가 있고, 이 온천의 욕탕(浴湯)은 밤에도 촛불을 켜고 목욕을 할 정도로 사람이 붐비었고, 또 시중드는 여자도 있었던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이 욕실과 욕조는 신라 시대부터 전해 온 것이었으니, 정포(鄭誧)[1309~1345]의 “탕천전자석 욕실지금존(湯泉傳自昔 浴室至今存)[더운 샘 예로부터 전해 와, 욕실이 지금까지 남아 있나니]”이라는 시 구절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온정을 읊은 시들은 조선 후기에 들어서도 꾸준히 창작되었으니, 윤훤(尹喧)[1573~1627]과 이춘원(李春元)[1571~1634] 등이 읊은 시들은 『동래부지(東萊府誌)』에서 찾아볼 수 있다. 1766년(영조 42) 온정을 개건하면서 세운 「온정개건비(慍井改建碑)」는 동래 사람인 송광적(宋光迪)[1690~1775]이 쓴 송덕비(頌德碑) 형식의 비문인데, “온정을 수리하니 사람들의 질병이 없어졌다.”고 한 데에서 온정욕이 질병 치료에 효험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았음을 알 수 있다.
[의의와 평가]
부산의 동래 지역을 찾았던 사람들에게 온정은 이국적인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색다른 방문지였다. 지금은 유흥지가 되었지만, 고전 문학을 통해 온정의 과거 본모습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또한 온정욕이 질병 치료에 효험이 있었다는 데에서 과거에도 명소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입욕 과정을 상세하게 묘사하고, 목욕 후의 상쾌하고도 나른한 감정까지 서술한 데서는 목욕 문화를 읊은 고전 문학 작품의 드문 예로 평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