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00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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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寧波堂-古典文學 |
영어의미역 | Classical Literature Singing Yeongpa-dang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수영구 수영동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현호 |
[정의]
조선 후기 부산의 영파당을 대상으로 지은 한시 작품.
[개설]
영파당(寧波堂)은 경상 좌도 수군절도사영의 객사(客舍)다. 원래 좌수영은 감만이포[부산광역시 남구 감만동]에 있었으나 태종 때에 울산 개운포에 옮겨 갔다가 다시 임진왜란 직전에 이르러 동래 남촌[수영구 수영동]으로 옮겼다 하는데, 그 연대는 확실치 않다. 좌수영의 축조 연대도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임진왜란 전에 이곳으로 좌수영이 이건되었을 때에는 벌써 성이 축조되었을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러나 그 성은 임진왜란을 계기로 폐허가 되었을 것이니, 그 후 언제 다시 축조된 것인지 또한 분명치 않으나 1652년(효종 3) 무렵 경상 좌수영을 다시 현재의 자리인 동래 남촌으로 옮겨 오고 축성한 것으로 보는 편이다.
객사인 영파당은 좌수영 성 안에 있는데 상영(上營), 중영(中營) 및 관운당(管雲堂), 세검헌(洗劍軒), 백화당(百和堂), 수항루(受降樓) 등과 더불어 중요 시설물 중 하나였다.
[영파당을 노래한 한시]
1. 권성구의 「차영파당운(次寧波堂韻)」
주연다감개(酒筵多感慨)[술자리서 감개함이 많아]
고창취가행(高唱醉歌行)[취가 행을 소리 높여 부르노니]
자괴룡종질(自愧龍鍾質)[꾀죄죄한 자질 부끄럽건만
쟁조토목형(爭嘲土木形)[토목 같은 모양을 다투어 비웃노라.]
영고귀등시(榮枯歸等視)[영화가 메마르면 같은 데 돌아가리니]
공업면사정(工業勉斯征)[공업엔 이 정벌을 힘써야 하리라]
가관해오객(歌管解娛客)[노래하고 피리 불며 즐거운 손과 헤어지니]
표연유세정(飄然遺世情)[문득 속세의 감정이 사라지노라].
권성구(權聖矩)[1642~1708]는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서여(恕余), 호는 구소(鳩巢)다. 1678년(숙종 4)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 전적(典籍), 병조 정랑(兵曹正郞) 등을 지냈다. 1688년(숙종 14) 진산 현감으로 재직하면서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었으나 모함으로 귀향하였다가, 1692년(숙종 18) 직강(直講)으로 복직하였다.
이때 「차영파당운」이란 시를 남겼을 것으로 생각된다. 권성구는 좌수영의 객사인 영파당에서 취했을 때의 호기를 드러냄과 동시에 공업(工業)을 이루려면 정벌에 힘써야 한다는 것들을 읊었다. 주위의 경관을 읊기보다 자신의 감정과 내면을 드러낸 시라 하겠다.
2. 신완의 「영파당 차판상운(寧波堂 次板上韻)」의 둘째 시
삼산하처멱봉래(三山何處覓蓬萊)[삼산 어느 곳에서 봉래는 찾는가?]
경렵차아기장외(鯨鬣嵯峩幾丈嵬)[고래수염 몇 장이나 우뚝하니 솟았도다]
창해풍도간궤석(滄海風濤看几席)[푸른 바다 풍랑을 앉을 자리처럼 보다가]
청유담소판준뢰(靑油談笑辦樽罍)[청유막에서 담소하니 술이나 마련하게]
미진가함흔파거(迷津舸艦掀波去)[나루 떠난 전함이 파도를 일으키며 가노니]
요일정기불수회(耀日旌旗拂水回)[빛나는 깃발 물방울 뿌리며 돌아오네]
화각일성최해람(畵角一聲催解纜)[화각 한 소리 닻을 내리라 재촉하니]
중류소고비여뢰(中流簫鼓沸如雷)[그중에 피리와 북소리 우레처럼 끓도다].
이 시는 신완(申琓)[1646~1707]의 「영파당 차판상운」의 둘째 시이다. 작자는 영파당에서 바라보는 좌수영 수군의 훈련을 역동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파도를 편하게 여기는 곳, 영파당에 있다가 술을 한 잔 들이켜 마신 후 파도를 일으키며 떠났다가 바닷물에 젖은 채 나루에 돌아오는 수군의 훈련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하였다.
권성구와 신완의 시는 모두 주위의 경치나 풍경보다는 좌수영에서의 감정과 호쾌한 기상, 그리고 좌수영의 훈련 모습을 읊고 있는데, 이러한 것은 영파당이 군영(軍營)인 좌수영의 객사라는 특수성에서 기인한 것이다.
이 외에도 이민구(李敏求)[1589~1670]을 비롯하여 엄황(嚴愰)[1580~1653], 윤계(尹棨)[1583~1636], 임천임(任天任), 이지완(李志完), 유수점(柳綏點), 김한철(金漢喆), 이경철(李景喆) 등이 지은 다수의 작품이 남아 있다.
[의의와 평가]
부산의 영파당에 대한 고전 문학은, 영파당 자체의 모습과 경치를 읊은 대신 도리어 영파당에서 지내는 선인의 호쾌한 기상이나 좌수영에서 훈련하는 모습을 노래하고 있다. 그런데 부산의 좌수영에서 지냈던 선인들의 삶과 감정, 그리고 수군의 모습들이 어떠했는지를 알아볼 수 있는 자료들이 드문 현실이다. 이러한 점에서 영파당에 대한 고전 문학의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다만 좌수영에서 수자리를 살면서 전함을 젓는 말단 병졸의 모습까지 담지 못한 한계를 지적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