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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하정을 노래한 고전 문학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0051
한자 蘇蝦亭-古典文學
영어의미역 Classical Literature Singing Soja-jeong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금정구
시대 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집필자 이현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미상 - 「동래회고, 용한창려집중도원도운(東萊懷古, 用韓昌黎集中桃源圖韻)」
특기 사항 시기/일시 미상 - 「송최함일직랑출안경상(送崔咸一直郞出按慶尙)」
특기 사항 시기/일시 1658년 추정 - 「소하정(蘇蝦亭)」
특기 사항 시기/일시 1670년연표보기 - 「내산감고(來山感古)」
관련 장소 소하정 - 부산광역시 금정구 일대

[정의]

고려 후기부터 조선 후기에 이르기까지 부산의 소하정을 대상으로 지은 한시 작품.

[개설]

소하정(蘇蝦亭)은 금정산 기슭에 있었던 정자이다. 소하(蘇蝦)라는 신선이 항상 흰 사슴을 타고 다니면서 금구선인(金龜仙人)과 더불어 놀았다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소하에 대해서는 정포(鄭誧)[1309~1345]와 신숙주(申叔舟)[1417~1475] 등의 시(詩)가 참고가 된다. 신숙주의 「동래현성문루기(東萊縣城門樓記)」에 “최치원[崔孤雲], 김겸효(金謙孝), 이소하(李蘇嘏) 제현(諸賢)이 일찍이 노닐었던 곳에 선적(仙跡)이 지금까지 완연한데 어찌 조고감흥(弔古感興)의 회포를 부칠 누관(樓觀)이 없어서야 되겠는가”란 구절이 보인다. 또한 정포의 「동래잡시(東萊雜詩)」란 시에는 “소하는 어디로 갔는가? 동쪽 물가에 옛 거처 있도다. 듣자니 흰 사슴을 탔다던가? 본디 벼슬을 누추하게 여겼지”라 하였다. 이로써 보건대 소하는 이씨 성(李氏姓)의 인물로, 벼슬을 멀리하고 흰 사슴을 타면서 신선같이 살았던 인물이라 하겠다.

소하정은 현재 그 정확한 위치를 찾을 수 없다. 부산 지방 고지도에 의하여 지금의 동래여자고등학교 맞은편 장전동 산자락으로 추정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소정(蘇亭)이라는 마을 이름만은 남아 있는데, 소정 마을금정초등학교가 있는 부산광역시 금정구 장전 3동 지역이며, 소정천(蘇亭川)과 소정 다리가 있었다.

[소하정을 노래한 한시]

소하정을 노래한 한시로는 정추(鄭樞)[1333~1382]의 「동래회고, 용한창려집중도원도운(東萊懷古, 用韓昌黎集中桃源圖韻)」, 고중지(高中址)의 「송최함일직랑출안경상(送崔咸一直郞出按慶尙)」, 홍위(洪葳)[1620~1660]의 「소하정」, 신정(申晸)[1628~1687]의 「내산감고(來山感古)」 등의 시를 꼽을 수 있다.

1. 정추의 「동래회고, 용한창려집중도원도운」

소하선생금저소(蘇嘏先生今底所)[소하 선생 지금 이곳에 오시자]

정전로목조무어(亭前老木鳥無語)[정자 앞 늙은 나무 새소리도 없어라*(1)]

금구백록도부견(金龜白鹿都不見)[금구(金龜)와 흰 사슴 모두 보이지 않건만]

암화개락원무주(岩花開落園無主)[주인 없는 동산에 바위에 핀 꽃 피었다 지누나*(2)].

정추의 주석*(1): 속칭소하정 조작불서(俗稱蘇嘏亭 鳥雀不棲)[민간에서 소하정에 참새도 깃들지 않는다 한다]

정추의 주석*(2): 소하상승백록 여금귀선인유시정(蘇嘏常乘白鹿 與金龜仙人遊是亭)[소하는 늘 흰 사슴을 타고서 금구선인과 이 정자에서 노닐었다]

정추는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공권(公權), 호는 원재(圓齋)다. 정추는 소하정에 얽힌 전설을 시로 읊었는데, 이를 통하여 당시에는 소하정이 아직 남아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2. 고중지의 「송최함일직랑출안경상」

야교압평호(野橋壓平湖)[들녘의 다리 평호(平湖)를 누르고]

소정의단록(蘇亭倚斷麓)[산 밑에 의지한 작은 정자는]

운석소하선(云昔蘇蝦仙)[그 옛날 소하 선인이]

내유기백록(來遊騎白鹿)[흰 사슴 타고 와서 놀았답니다].

고려 후기의 문인 고중지가 지은 이 시에서도 정자가 남아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위에서 인용한 정추와 고중지의 시는 소하정만 노래한 것이 아니라, 동래(東萊)를 회고하는 중에 소하정까지 같이 언급한 것이다.

3. 홍위의 「소하정」

백록금구하처귀(白鹿金龜何處歸)[흰 사슴과 금구는 어디로 갔는가?]

십주삼도정상수(十洲三島定相隨)[신선계(十洲三島)로 따라갔으리라]

춘래지견암화발(春來只見巖花發)[봄이 와도 바위에 피는 꽃만 볼 수 있으니]

산하유기처처의(山下遺基處處疑)[산 아래 곳곳이 옛 터인가 하노라].

이는 소하정을 시제(詩題)로 내세워 단독으로 노래한 칠언 절구의 한시이다. 홍위는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군실(君實), 호는 청계(淸溪)다. 홍위는 1658년(효종 9) 5월 경상도 관찰사가 되는데, 이 시는 이때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소하정」에서 흥미로운 점은 소하정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기 어려웠다는 점이다. 홍위는 이 시의 제목에 긴 서문을 들어서 위치를 기비현(其比峴) 아래로 추정하였다. 그 서문을 아래에 소개한다.

“『여지승람』에 이르길, 소하는 늘 흰 사슴을 타고 금구선인과 놀았는데, 민간에선 소하정에 참새도 깃들지 않는다 한다. 지금 사람은 남은 자취조차 잃어버렸다. 혹자는 동래부 남쪽 양장촌(羊腸村) 길가에 있다고 하고, 혹자는 동래부 기비현 아래에 있다고 한다. 정추의 시에서, ‘금구와 흰 사슴 모두 보이지 않건만, 주인 없는 동산에 바위에 핀 꽃 피었다 지누나’라고 하였다. 이로써 보건대 기비현 아래가 옛 터[遺址]인 듯하다[輿地勝覽云: ‘蘇嘏常乘白鹿 與金龜仙人遊 俗稱蘇嘏亭鳥雀不棲’ 今人已失遺址 或云在府南羊腸村路傍 或云在府西其比峴下 鄭樞詩云: ‘金龜白鹿都不見 巖花開落園無主’ 以此見之 則其比峴下 似是遺址].”

4. 신정의 「내산감고」 네 수 중 한 수

거민지점구정기(居民指點舊亭基)[옛 정자 터라 주민들 가리켜 주건만]

유수청산처처의(流水靑山處處疑)[물 흐르는 푸른 산 곳곳인가 하노라]

기록구천인이원(騎鹿九天人已遠)[사슴 탄 신선은 사라진지 오래요]

세간공유정추시(世間空有鄭樞詩)[세상엔 정추의 시만 쓸쓸히 남았네].

신정은 조선 후기의 문인으로,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백동(伯東), 호는 분애(汾厓)다. 1670년(현종 11) 경접 위관(京接慰官)으로 동래에 내려왔는데, 이때 지은 「내산감고」 네 수 중 한 수에서 소하정을 읊고 있다.

신정 역시 홍위의 시에서처럼 옛 정자 터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 의구심을 가질 뿐이다. 사라지고 없는 정자와 옛터를 두고 정추의 시만 세상에 전해지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신정은 시의 말미에서 “위 소하대(蘇蝦臺)는 본부 신선의 이름이다[右蘇蝦臺本府仙人名]”란 주석을 달았다. 여기서 ‘소하정’이라 하지 않고 ‘소하대’라 표기한 부분이 흥미롭다. 추정컨대, 이는 정자는 이미 사라지고 옛터만 남아 있기 때문에 ‘정(亭)’ 대신 ‘대(臺)’라 한 것이거나, 또는 겸효대(謙孝臺)와 혼동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외에도 소두산(蘇斗山), 윤훤(尹喧), 이춘원(李春元), 이원진(李元鎭) 등이 읊은 시들이 더 있으나 대체로 동래의 현령이나 부사로 부임했다가 지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국문 기행 가사로는 정현덕(鄭顯德)의 「봉래별곡(蓬萊別曲)」이 있으나, 소하정에 대한 고전 문학은 소하정 만을 시제(詩題)로 내세워 읊기 보다는, 대체로 동래 지방을 지나가는 문인들이 동래의 여러 명승지와 고적을 노래하는 중에 소하정까지 같이 노래한 것이 많다.

[의의와 평가]

소하정은 이른 시기에 훼손되어 그 터가 정확하게 어디인지도 불분명한 실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문인들은 소하정의 터를 방문하여 노래했을 정도로 많은 관심을 표명하였다. 타지에 와서 신선의 자취를 찾는다는 흥미가 소하정에 대한 관심을 지속케 한 듯하다. 소하정을 노래한 고전 문학이 소하정에 얽힌 민간의 이야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는 듯하다. 홍위가 소하정의 터를 나름대로 비정한 것은 의의가 있으니, 홍위의 기록과 여러 고지도를 참고하는 한편 새로운 문헌 자료를 발굴하고 꼼꼼히 고찰하여 지금이라도 소하정의 터를 정확하게 판정할 필요가 있다 하겠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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