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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래관을 노래한 고전 문학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0049
한자 蓬萊館-古典文學
영어의미역 Classical Literature Singing Bongnae-gwan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동래구 충렬대로 237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현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638년연표보기 - 「봉래관(蓬萊館)」
특기 사항 시기/일시 1771년 49세 이전연표보기 - 「봉래관 시판의 운자를 차운하여(次蓬萊舘板上韻)」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81년연표보기 - 『일사집략(日槎集略)』
관련 장소 봉래관 - 부산광역시 동래구 충렬대로 237번길 15-6지도보기

[정의]

조선 후기 부산의 봉래관을 대상으로 지은 한시나 산문 등의 문학 작품.

[개설]

봉래관(蓬萊館)은 동래부에 있던 객사(客舍)의 이름이다. 봉래관에는 조선 시대 때 전패(殿牌)를 모셔 두고 배례(拜禮)를 올렸으며, 중앙 관원들의 유숙(留宿)과 외객, 특히 일본의 사신을 영접하던 곳으로 사용되었다. 대문 3칸, 좌우 협문 각 1칸, 행랑 6칸, 북공수(北公須) 8칸으로 총 39칸의 목조 건물인데, 동쪽은 인빈헌(寅賓軒)이고, 서쪽은 질성헌(秩成軒)이라 하였다.

정확한 창건 연대는 미상이다. 다만 『동래부지(東萊府誌)』에는, “1612년(광해군 4) 부사 성진선(成晉善)[1557~?]이 동상방(東上房)을 세우고, 1618년(광해군 10)에 부사 윤민일(尹民逸)[1564~1635]이 정청(正廳)을 조성하였으며, 1629년(인조 7)에 부사 유여각(柳汝恪)[1598~?]이 정청의 서헌(西軒) 중문(中門) 대문(大門) 공수(公須)를 지었다. 1646년(인조 24)에 부사 민응협(閔應協)[1597~1663]이 동상방을 중창하였다고 하니 나머지도 모두 중창한 것 같다. 1703년(숙종 29)에 화재로 타 버려 1705년(숙종 31)에 부사 황일하(黃一夏)[1644~1726]가 중창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개항기에는 객사로서의 기능은 잃어버린 채 동래공립보통학교 교사(校舍)로 사용되었다. 동래공립보통학교는 1897년에 설립 인가를 받았으니, 이보다 몇 해 전부터 학교 교사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동래공립보통학교는 현재 내성초등학교로, 봉래관을 교사로 사용하다가 1951년 학소대 임시 교사를 거쳐 1955년도에 복천동 고분군 남쪽의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그렇기에 봉래관의 훼손 시기 및 과정 역시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는 실정이다. 지금은 동래 시장 남쪽 양장점 앞에 동래부 객사 터 표석만이 남아 있어 옛 위치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봉래관을 노래한 한시]

봉래관에는 수십 판이나 되는 많은 문인 객사들의 시가 걸려 있었는데, 설곡(雪谷) 정포(鄭誧)[1309~1345]의 시를 많이 차운했다. 그 이유는, 동래 현령으로 좌천되었다가 끝내 동래에서 생을 마감한 홍간(洪侃)[?~1304]을 위해 정포가 지었던 시가 한 시대에 회자되었는데, 후세에 이것을 판각하여 봉래관에 걸었기 때문이다.

한사(寒沙) 강대수(姜大遂)[1591~1658]는 1638년에 동래 부사(東萊府使)가 되었는데, 이때 정포의 운자를 차운하여 지은 시가 전해진다.

1. 강대수의 「봉래관(蓬萊館)」

황성임해제(荒城臨海際)[황폐한 읍성 바닷가에 임해 있고]

고수방건단(古戍傍乾端)[옛 수자리 하늘 끝에 곁에 있네]

객사수상박(客使隨商舶)[나그네 사신은 장사치 배 따르고]

만정화설관(蠻情話舌官)[오랑캐 감정은 역관에게서 전달되네]

고회공설일(孤懷空說釰)[외로운 감회는 부질없이 검에 말할 뿐이니]

만사차빙란(萬事此憑闌)[만사는 이로 인해 막혔도다]

백진쌍봉빈(白盡雙蓬鬂)[양쪽 살적은 백발에 쑥대머리이건만]

시위거취난(時危去就難)[시절이 위태로우니 거취가 어렵구나].

바닷가에 접해 있는 읍성, 그리고 수자리는 바다 끝 하늘과 맞닿은 곳에 있다. 이곳에서 나그네와 사신들은 장사치들의 배를 따라 이동하며, 역관을 통해서야 왜인의 감정들이 겨우 전달될 뿐이다. 강대수는 이곳에서 중앙 정계로 복귀하고 싶으나 자신이 이미 늙은 데다 거취조차 어려운 심사를 토로하고 있다.

2. 정범조의 「봉래관 시판의 운자를 차운하여(次蓬萊舘板上韻)」

천리봉래관(千里蓬萊舘)[천 리의 봉래관]

변음불견단(邊陰不見端)[가장자리 아득해 끝을 볼 수 없도다]

기수욕한식(羈愁欲寒食)[나그네 시름에 밥은 안 넘어가고]

형역위미관(形役爲微官)[행색은 미관이구나]

침석운도탕(枕席雲濤盪)[잠자리에선 구름 같은 파도가 일렁이고]

주성화조란(州城花鳥闌)[고을 도성에는 새와 꽃이 흐드러지누나]

수언삼도근(誰言三島近)[누가 말했든가 삼도(三島)가 가깝다고]

채약고금난(採藥古今難)[약초 캐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어려운 것을].

해좌(海左) 정범조(丁範祖)[1723~1801]가 지은 이 시도 역시 정포 시의 운자를 차운하였다. 정범조는 청년기 때 영남 일대를 유람하였는데, 이때 지은 것으로 보인다. 바닷가 끝을 볼 수 없는 천리 먼 곳의 봉래관 풍경의 웅장함과 미관(微官)으로 나그네 신분인 자신의 초라한 처지를 대비하였다. 잠자리에 누워서도 파도가 일렁이는 듯하건만 그 심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도성엔 꽃이 피고 새가 지저귀고 있다. 그러면서 불로초를 캘 수 있는 바다 건너 신선계는 지난한 일임을 말하면서 시를 마무리하였다.

이외에도 조문수(曺文秀)[1590~1647], 홍위(洪葳)[1620~1660], 홍양호(洪良浩)[1724~1802] 등의 작품이 있으나 정포 시의 운자를 차운한 경우가 대부분이며, 조수삼(趙秀三)[1762~1849]의 「봉래관」이란 작품은 차운하지 않은 경우에 해당한다.

[봉래관을 노래한 산문]

이헌영(李憲永)[1837~1907]은 1881년(고종 18)에 신사 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가서 조사하고 보고 들은 것을 『일사집략(日槎集略)』으로 남겼는데, 그중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

“호막(戶幕)과 고주부(高主簿)·함참봉(咸參奉)을 데리고 본부 객사에 들어가니 객사 뜰 왼쪽에 송공단(宋公壇)[임진왜란 때 부사 송상현이 순절한 곳]이 있고, 단의 좌우엔 그를 따라 순절한 여러 사람의 위패를 새긴 돌이 있다. 그런데 기생 김섬(金蟾)[금섬] 또한 그를 따라 순절하여 나란히 새겨 있어 더욱 가탄(可歎)하였다. 4월 15일에 이 단에 제사를 드린다고 하였다.”

객사의 뜰 왼쪽에 송공단이 있고, 단의 좌우엔 송상현을 따라 순절한 사람의 위석이 있는 배치를 언급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그를 따라 순절했다 하여 기생이던 김섬 또한 나란히 새겨져 있는데, 이것을 가탄했다는 것이다. ‘가탄’은 ‘감탄’의 뜻이 있긴 하나 통상적으로는 ‘탄식할 만하다’란 뜻으로 쓰인다. 이헌영이 이렇게 표현한 까닭은, 봉래관이 본질적으로 나그네가 묵고 가는 객사라는 데서 연유한다. 곧 타지에서 와서 이국인 일본으로 떠나야 하는 나그네의 신분에서 깊은 정황을 알지 못한 채 표면적 신분만을 보고 피상적으로 파악했기 때문이다.

나그네의 신분으로 봉래관에서 유숙하는 심사를 잘 표현한 것으로는 남용익(南龍翼)[1628~1692]의 시 구절을 꼽을 수 있다. “봉래관에서 등불 심지 돋우는 밤, 대궐을 연모하고 집을 그리워함은 똑같은 마음이라[蓬萊館裡挑燈夜, 戀闕思家一種心]”는 구절에서는 낯선 여행지에서 밤에 잠들지 못하고 한양과 집을 그리워하고 걱정하는 나그네로서의 심회가 잘 드러나 있다.

[의의와 평가]

부산의 봉래관을 노래한 고전 문학에서는, 봉래관 자체의 모습과 운치를 읊기보다는 나그네로서 겪은 피상적 견문, 외롭고 쓸쓸한 감정, 상선(商船)과 역관의 이국적인 풍경들을 읊은 경우가 많다. 문집에서 찾을 수 있는 많은 작품들 역시 정포의 시에 차운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부산의 고전 문학을 언급할 때 봉래관에 대한 소개가 드문 것은 현재 봉래관에 대한 자료들이 한 곳에 취합되어 있지 않고 문집에 산재해 있기 때문이다. 이는 아마도 봉래관이 현존하지 않는 데다 금강산의 봉래관과 구별해야 하는 까다로움이 있어서인 듯하다. 부산의 문화 유적을 소재로 한 고전 문학 작품이라는 점에서 자료의 선별 정리가 무엇보다 시급하다 하겠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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