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무우루를 노래한 고전 문학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0047
한자 無憂樓-古典文學
영어의미역 Classical Literature Singing Muu-ru Pavilion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동래구 충렬대로 238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권정원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조선 말기 - 「남문루(南門樓)」
특기 사항 시기/일시 조선 후기 - 「동래성남문비기(東萊城南門碑記)」
관련 장소 무우루 - 부산광역시 동래구 충렬대로 238 일대

[정의]

조선 후기 부산의 무우루를 대상으로 지은 한시나 산문 등의 문학 작품.

[개설]

무우루(無憂樓)는 ‘근심을 없애는 문루’라는 뜻으로, 동래 읍성 남문에 있던 문루의 이름이다. 현재 동래 읍성은 북문을 제외하고는 동문, 서문, 남문 어느 곳 하나 남아 있지 않다. 이 문루는 다른 문루와 다르게 2중 구조로 되어 있었는데, 남문의 앞쪽 문은 세병문(洗兵門), 뒤쪽 문은 주조문(朱鳥門)이라 했고, 주조문에 ‘무우루(無憂樓)’라는 현판이 달려 있었다. 세병(洗兵)은 ‘무기를 씻다’는 의미이고, 무우(無憂)는 ‘근심을 없앤다’는 의미이니, 외적 침입 이후 평화를 염원하는 조상들의 간절한 기원이 이 현판에 담겨 있다 하겠다.

따라서 무우루를 노래한 고전 문학은 임진왜란의 상흔과 순절한 이들의 충의를 노래한 내용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현재 무우루를 노래한 고전 문학은 한시 1편과 산문 1편을 제외하고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실정이다.

[무우루를 노래한 한시]

동래 읍성과 주변 누각을 노래한 한시는 많은 편이나, 정작 무우루를 노래한 한시는 거의 없다. 현재 전하는 작품으로는 후산(后山) 허유(許愈)[1833~1904]의 「남문루(南門樓)」라는 칠언 절구의 시 1편뿐이다. 이 역시 무우루라는 이름 대신 남문의 문루라는 ‘남문루’를 제목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시 내용을 살펴보면 임진왜란 당시 왜적에 맞서 싸웠던 전쟁의 현장으로서의 무우루가 그 대상임을 알 수 있다. 천곡(泉谷) 송상현(宋象賢)[1551~1592]이 군민을 거느리고 적에 맞서 싸우다 순절한 곳이 바로 동래 읍성 남문루인 무우루였다. 허유가 노래한 「남문루」의 모습을 직접 살펴보자.

백척남루급급위(百尺南樓岌岌危)[백 척 높이의 남문루 아슬아슬 위태롭고]

해산나렬공부지(海山羅列共扶持)[쭉 늘어진 해산(海山)은 서로 힘겹게 지탱하고 있네].

충신사거혼유재(忠臣死去魂猶在)[충신은 죽고 없으나 영혼만은 여전히 남아 있으니]

상상조의불굴시(像想朝衣不屈時)[조복(朝服) 입고 굴복하지 않던 때가 눈앞에 선하네].

왜적을 방비하기 위해 세운 남문루는 백 척 높이를 자랑하나 위태롭기 그지없고, 바다를 둘러싼 산들도 서로 몸을 기대 쭉 늘어서 있지만 겨우 지탱하고 있는 듯한 형세이다. 마침내 왜적이 쳐들어오고, 이에 맞서 싸우던 충신들은 죽고 없지만 그 영혼만은 이 누각에 남아 있으니, 조복을 입고 왜적에 당당히 맞서던 그날의 모습이 눈앞에 선하다고 읊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동래 부사였던 송상현이 왜적이 동래성에 쳐들어왔을 때 성문을 닫고 무우루에 올라가 끝까지 왜적에 대항하던 그 모습, 갑옷 위에 조의(朝衣)를 입고 끝내 항복하지 않으리라는 의지를 보여 주던 그 모습이 무우루의 모습과 오버랩 되고 있다.

[무우루를 노래한 산문]

무우루를 노래한 산문으로는 「동래남문비기(東萊南門碑記)」 1편을 꼽을 수 있다. 이 작품은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1607~1689]이 ‘동래남문비’에 대한 기문(記文)으로 지은 것이다. 여기에는 임진왜란 때의 전투 상황과 그 결과가 기록되어 있는데, 송상현 공의 충절을 추모한 것이 주 내용이고, 그 밖에 부산 지방의 순절 사실 등을 수록하였다. 따라서 「동래남문비기」는 동래 읍성 남문을 배경으로 임진왜란 당시 순절한 이들을 추모하기 위한 공덕비에 대한 기록으로, 무우루와 가장 관련 깊은 작품이라 하겠다. 더구나 기문 중에는 송상현이 남문루[무우루]에 올라 왜적에 대항하는 장면이 잘 묘사되어 있다. 일부분만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왜적이 이어 동래성(東萊城)을 치니, 병사(兵使) 이각(李珏)이 왜적의 많음을 보고 그 별장(別將)과 더불어 성문을 열고 달아나므로 부사(府使) 송공상현(宋公象賢)이 직무에 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나, 남문루에 올라가 군민을 거느리고 적을 막으니, 왜적이 취병장(聚兵場)에 주둔하고 먼저 목판(木板)에 글을 써서 보내어 성 밖에 세웠는데, 그 내용은, ‘싸우려면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면 우리에게 길을 빌려다오.’ 하였다. 그러자 공도 목판에다 글을 써서 적진에 던지기를,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려 주기는 어렵다.’ 하니, 왜적이 마침내 성을 세 겹으로 포위하고, 15일 아침에는 왜적이 성의 뒷산으로부터 성을 부수고 돌입하였다. 이때 공은 의자에 앉아 조의를 갑옷 위에 입었다. 마침 왜적 중에 평조익(平調益)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는 공이 일찍이 친절하게 접대했던 사이였으므로, 급히 달려와서 공에게 눈짓하여 피하라고 하였으나 공이 응하지 않자, 또 옷을 끌면서 달아날 틈을 가리켜 주므로, 공이 의자에서 내려와 북쪽 하늘을 바라보고 절을 하였다. 절이 끝나자 글을 써서 아버지에게 영결하고, 부하에게 이르기를, ‘너는 나의 배 밑의 사마귀로 나의 시신을 징험하라.’ 하였다. 공의 비장(裨將) 송봉수(宋鳳壽)·김희수(金希壽) 등 4, 5인과 향리(鄕吏) 송백(宋伯) 등이 힘을 다하여 싸우다가 다 전사하였고, 공도 마침내 해를 당하였다.”

[의의 및 평가]

무우루는 전쟁의 아픔과 평화를 염원하는 선인들의 소망이 담겨 있는 곳이다. 따라서 무우루를 노래한 고전 문학은 임진왜란의 상흔과 순절한 이들의 충의와 평화에 대한 염원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서 국방 요충지로서의 부산의 면모를 가장 잘 보여 준다고 하겠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