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00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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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沒雲臺-古典文學 |
영어의미역 | Classical Literature Singing Morun-dae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동 산144 |
시대 | 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
집필자 | 권정원 |
[정의]
고려 후기부터 조선 후기 사이에 부산의 명승지 몰운대를 대상으로 지은 한시 작품.
[개설]
몰운대(沒雲臺)는 낙동강 하구의 최남단에 있는 경승지이다. 낙동강 하구에 안개와 구름이 끼는 날에는 그 속에 잠겨서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몰운대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예로부터 우거진 숲과 기암괴석, 출렁거리는 푸른 파도, 펼쳐진 모래밭으로 뛰어난 경치를 간직한 곳인 데다가 국방 요새로서도 중요한 곳이기 때문에 국방의 임무로 오는 관원은 물론 부산을 찾는 유람객들이 반드시 들르는 명소였다. 따라서 몰운대를 노래한 시는 많은 편으로, 현재 확인되는 바로는 30~40편의 한시가 남아 있다.
[몰운대를 노래한 한시]
몰운대는 부산을 대표하는 명승지로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읊는 한시를 지었다. 몰운대를 노래한 한시는 직접 몰운대를 대상으로 삼은 경우와, 부산 지역을 대상으로 읊거나 부산으로 떠나는 벗을 전송하는 시에서 간접적으로 몰운대가 언급된 경우가 있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1762~1836]의 「남포월야동제군범주(南浦月夜同諸君汎舟)」, 상촌(象村) 신흠(申欽)[1566~1628]의 「송리정랑욱부통제막부(送李正郞稢赴統制幕府)」 등이 후자에 속한다 하겠다. 그리고 몰운대와 주변 풍광을 직접 노래한 한시는 38편 정도가 남아 있는데, 내용은 ‘몰운대를 대상으로 노래한 시’, ‘몰운대에서 바라본 풍광을 노래한 시’, ‘몰운대 앞바다에서 벌어진 임진왜란의 추억을 노래한 시’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이들 역시 작자의 입장에 따라 ‘관광의 목적으로 몰운대를 찾은 유람객의 입장에서 아름다운 자연 경관을 읊고 감상을 노래한 시’, ‘몇 달 혹은 몇 년을 머물면서 책무를 수행해야 하는 관인의 입장에서 지방관의 책무를 독려하거나 객지 생활의 고단함을 노래한 시’로 나눌 수도 있다.
1. 유람객의 입장에서 몰운대와 주변 풍광을 노래한 한시
1) 황준량의 「몰운대차박중초운(沒雲臺次朴仲初韻)」
대고천활해분수(臺高天濶海氛收)[대 높고 하늘 넓고 바다 기운 잔잔한데]
주득선구장랑유(做得仙區壯浪遊)[신선의 땅에서 씩씩하게 마음껏 노니네]
수진동남산해거(袖盡東南山海去)[소매 끝닿은 동남쪽 산과 바다 저 멀리]
유인응원소분류(遊人應怨少分留)[노니는 사람 오래 머물지 못함 원망하리].
이는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1517~1563]이 1551년(명종 6) 경상도 감군어사(慶尙道監軍御使)로서 경상도 전 지역을 다니며 살필 당시 지은 칠언 절구의 한시이다. 하늘 넓고 바다 잔잔한 날에, 마치 신선이 노닐던 곳 인양 신비롭기까지 한 몰운대에 올라 마음을 열고 마음껏 경관을 감상하니, 저 멀리 손으로 가리킬 수 있는 끝닿은 동남쪽 땅은 진정 신선의 경지이기 때문에 이곳을 유람하는 사람들은 더 머물지 못하고 떠나야 하는 아쉬움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노래하였다. 하늘과 바다와 대가 어울려 신선의 경지를 뽐내는 몰운대의 경관을 잘 표현한 작품이라 하겠다.
2) 구봉령의 「몰운대차운(沒雲臺次韻)」
창연단록해동미(蒼然斷麓海東湄)[푸르게 깎아지른 산언덕 바다의 동쪽가]
표출층운세욕비(標出層雲勢欲飛)[피어오른 겹겹의 구름 힘차게 날려 하네]
옥우냉풍취제애(玉宇冷風吹霽靄)[하늘의 찬바람은 맑은 노을 속에 불고]
함지홍랑용징휘(咸池紅浪湧澄暉)[함지(咸池)의 붉은 물결 맑은 빛 속에 솟아나네]
우선생학유상관(羽仙笙鶴遊常慣)[신선의 피리와 학은 노니는데 일상적인 것]
인세진분도자희(人世塵氛到自稀)[세상 먼지 낀 기운 절로 드물어지는 곳에 왔네]
장소수성연무리(長嘯數聲煙霧裡)[연기와 안개 속에 긴 휘파람 소리 여러 번]
봉영하허로의미(蓬瀛何許路依微)[봉래 영주 어디인가 길은 좁디좁구나].
소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져 있는 언덕이 가파르게 바다로 꽂혀 있고, 그 푸른 언덕과 바다를 두르고 있는 구름은 두둥실 떠오를 듯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있다. 시간이 지나 해 질 녘의 몰운대는 해가 잠긴다고 알려진 서쪽 함지(咸池), 즉 바다로 떨어지는 붉은 해와, 살랑거리는 찬 바닷바람에 일렁이는 붉은 물결을 작자는 묘사하고 있는데, 이 장면은 다대포 지역의 대표적인 풍경 가운데 하나이다. 이러한 비경 속에 서 있는 작자 구봉령(具鳳齡)[1526~1586]은 마치 스스로가 학을 타고 생황을 부는 신선이 된 듯, 세상에 찌든 모든 먼지와 티끌이 씻겨 나가는 맑은 마음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구름에 휘감긴 좁은 몰운대의 길을 오르는 작자는 지금 봉래산과 영주로 올라가고 있는 것이다.
2. 관원의 입장에서 국방의 요새로서의 감회를 노래한 한시
1) 박제형의 「몰운대(沒雲臺)」
부시무심유차대(不是無心有此臺)[무심히 이 대(臺)가 있는 건 아니로다]
정공당일사감애(鄭公當日事堪哀)[정공(鄭公)의 그때 일에 슬픔을 견디네]
휴양성외도도수(睢陽城外蹈滔水)[수양성 밖 일렁이는 물가로]
남팔남아거후래(南八男兒去後來)[남팔남아 떠난 후 나 이제야 왔네].
이 시에서는 몰운대가 아무런 의미도 없이 풍경만 자랑하는 곳이 아니라, 정운(鄭運)의 장렬한 순국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니, 작자 박제형(朴齊珩)은 그 옛날 정공(鄭公)을 생각하면 슬픈 마음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고 표현하고 있다. 정운은 충무공 이순신의 우부장(右部將)으로 왜군과 싸우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던 해인 1592년(선조 25) 9월 1일 몰운대 앞바다에서 장렬하게 전사한 인물이다. 몰운대 끝 부분 언덕 위에는 정운공의 순국을 기리는 순의비(殉義碑)가 있다. 비문에는 정운이 선봉으로 몰운대 아래에서 왜적을 만났을 때 몰운대의 ‘운(雲)’자가 그의 이름인 ‘운(運)’과 음이 같은 데에서 자신이 죽을 것을 예시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죽음을 각오하고 분전하다가 순절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박제형은 이 비석을 보고 임진왜란의 통한을 떠올렸으며, 정운을 절개를 지키다 죽은 남제운(南霽雲)의 남팔남아(南八男兒)와 연결하여 그의 뜻을 기렸다. ‘남팔남아’라는 숙어는 당나라 때 남씨의 팔(八)남으로 태어난 남제운이 장순(張巡)과 함께 절개(節槪)를 지켜 죽었다는 데서 유래하여 ‘절개(節槪)가 굳은 장한 대장부(大丈夫)’를 일컫는 말이 되었다. 박제형에게 몰운대는 국방의 요새, 절의의 장소로 기억되고 있다.
박제형은 ‘몰운대’라는 제목의 시를 2편 남겼는데, 다른 칠언 절구의 「몰운대」 시는 다음과 같다.
2) 박제형의 「몰운대(沒雲臺)」
몰운대하몰운비(沒雲臺下沒雲悲)[몰운대 아래 지는 구름 슬프구나]
수저어용한역지(水底魚佣恨亦知)[물 밑 어룡도 그 한을 알리라]
운가몰혜명불몰(雲可沒兮名不沒)[구름이야 지겠거니 이름이야 지겠는가]
몰운대상정공비(沒雲臺上鄭公碑)[몰운대 위 정공의 비 우뚝하도다].
[의의 및 평가]
몰운대는 예로부터 뛰어난 경치를 간직한 곳으로 이름나 있었기에, 많은 시인들이 이곳을 들러 시를 남겼다. 다대포 인근이라 임진왜란의 아픔을 노래한 시도 있으나, 몰운대를 노래한 고전 문학의 대부분은 몰운대의 아름다운 풍광을 노래한 시들로, 양적으로도 상당히 많이 남아 있다. 이를 통해 아름다웠던 몰운대의 옛 모습을 엿볼 수 있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