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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공단을 노래한 고전 문학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0045
한자 萬公壇-古典文學
영어의미역 Classical Literature Singing Mangong-dan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동구 자성로 99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권정원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576년연표보기 - 「만공단(萬公壇)」
특기 사항 시기/일시 1643년연표보기 - 「진동문(鎭東門)」
특기 사항 시기/일시 조선 중기 - 「부산성상차두봉운(釜山城上次斗峯韻)」
특기 사항 시기/일시 조선 중기 - 「등부산고성(登釜山故城)」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11년연표보기 - 「동사록(東槎錄)」
특기 사항 시기/일시 조선 후기 - 「만공단(萬公壇)」
특기 사항 시기/일시 조선 말기 - 「만공단(萬公壇)」
관련 장소 만공단 - 부산광역시 동구 자성로 99지도보기

[정의]

조선 시대 부산의 만공단을 대상으로 지은 한시나 산문 등의 문학 작품.

[개설]

만공단(萬公壇)은 명나라 만세덕(萬歲德)의 제단(祭壇)이다. 만세덕은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조선을 구원하기 위해 파견된 명나라 군사를 거느린 장수로서, 왜적을 소탕한 이후 1599년(선조 32) 8월부터 1600년까지 자성대(子城臺)에서 주둔하였다. 그 후 만세덕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성 안에 만공단을 세웠다. 자성대 위에는 만세덕의 기공비(記功碑)가 있고, 그 곁에 만공단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자성대의 다른 이름이 만공대(萬公臺)이다. 지금은 만공대보다 자성대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져 있다. 현재 자성대에는 만세덕에 대한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만공단을 노래한 고전 문학 역시 많이 남아 있지 않은데, 현재 확인되는 바로는 한시 7편 정도와 일기 속에 등장하는 만공단의 언급 정도가 전부라 하겠다.

[만공단을 노래한 한시]

만공단을 노래한 한시는 7편 정도가 있다. 이 중 만공단을 직접 노래한 것은 만오(晩悟) 신달도(申達道)[1576~1631]의 「만공단」,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1818~1886]의 「만공단」, 그리고 허유(許愈)의 「만공단」 3편뿐이다. 만공단 주변 경물을 노래한 것으로는 죽당(竹堂) 신유(申濡)[1610~1665]의 「진동문(鎭東門)」이 있으며, 만공단이 있는 만공대[자성대]를 노래한 시로는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1571~1637]의 「부산성상차두봉운(釜山城上次斗峯韻)」과 동주(東洲) 이민구(李敏求)[1589~1670]의 「등부산고성(登釜山故城)」 등이 있다. 이밖에 시 내용에서 간접적으로 만공단이 언급된 한시도 간혹 보이는데, 낙하생(洛下生) 이학규(李學逵)[1770~1835]의 「부산보동옥여신박현묵념운공부(鬴山堡同玉如身朴玄默拈韻共賦)」가 있다. 한시의 내용은 만세덕의 공을 기리면서 왜군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낸 것이 대부분이고, 지난날 만공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만공단을 바라보며 인생 무상함을 노래한 시도 간혹 있다. 대표 작품을 감상해 보자.

1. 신달도의 「만공단」

황조은택대여천(皇朝圁澤大如天)[황제의 조정 은혜는 하늘만큼 커]

장사동정칠팔년(壯士東征七八年)[굳센 군사 동쪽 정벌 7~8년]

해상유허단상흘(海上遺墟壇尙屹)[바닷가 옛 터 단은 아직 우뚝하니]

지금인도만공현(至今人道萬公賢)[지금 사람들 만공 어질다 말하네].

정유재란 당시 작자인 신달도는 혈기 왕성했던 20대 청년이었다. 20대의 그의 마음속에는 우리를 침범한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 강하게 자리 잡았기에 오랑캐와의 화해는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 시에서 신달도는 명나라 황제의 은혜와 만세덕의 현명하고도 어진 태도를 칭송하였는데, 이것은 반대로 오랑캐 일본에 대한 적개심을 극도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만공대가 있는 자성(子城)은 자성대를 중심으로 동문인 진동문, 서문인 금루관(金壘關), 남문인 진남문(鎭南門), 북문인 구장루(龜藏樓)가 있었다고 한다. 현재는 서문인 금루관이 복원되어 있고, 동문인 진동문에는 ‘건춘루(建春樓)’라는 편액이 붙어 복원되어 있을 뿐이다.

2. 신유의 「진동문」

고성독의사유유(孤城獨倚思悠悠)[외로운 성에 홀로 오르니 생각은 끝이 없고]

절도운연생원수(絶島雲煙生遠愁)[외딴 섬 구름과 안개 오랜 시름을 자아내네]

잔각일성문폐후(殘角一聲門閉後)[아직 남은 뿔피리 소리에 문 닫힌 뒤]

해풍취월상고루(海風吹月上高樓)[바닷바람 달을 불어 높은 다락에 오르네].

이는 조선 중기 문인 신유가 자성대의 동문인 진동문을 본 감회를 읊은 칠언 절구의 한시이다. 신유가 부산을 찾은 것은 1643년(인조 21) 통신사의 종사관으로 일본에 가기 위해서였다. 부산에 머무른 동안 만세덕의 군대가 철수하고 이미 깨끗하게 정비되어진 자성대에 올랐다. 자성대는 지금은 이미 정비되어 전쟁의 상흔을 눈으로 확인할 수 없지만, 40여 년 전 일본군에 의해 침입을 받아 왜군의 성이 되었다가 명나라 군대의 주둔지로, 다시 우리의 성으로 되돌아오는 기구한 운명을 가진 곳이다.

그런 자성대에 홀로 오르니, 옛날 일본에게 침입을 받았던 부산에 대한 생각이 끝없이 이어진다. 더구나 멀리 구름과 안개에 가려 흐릿하게 보이는 외딴 섬인 대마도를 바라보니, 오래 묵은 시름이 다시 살아나는 듯하다. 아직도 그 아픈 기억이 남아 있는 이 전장의 뿔피리 소리에 평상시처럼 문은 닫히고 바닷바람에 불려온 듯 밝은 달만 무심히 진동문 다락 위에 걸려 있다고 노래하였다.

[만공단을 노래한 산문]

만공단을 직접 노래한 산문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조선 후기 일기에 만공단을 방문했다는 기록이 간혹 보인다. 유상필(柳相弼)[1782~?]은 1811년(순조 11) 군관으로 일본 통신사 행렬에 참여했는데, 그때의 경험을 일기로 남겼다. 1811년 3월부터 7월까지 5개월간의 일기인 『동사록(東槎錄)』에는 만공단을 방문했다는 기록이 총 4회 보인다. 3월 4일, 3월 7일, 3월 28일, 윤 3월 4일의 기록이 그것이다. 내용은 “두 사신은 만공단에 올라갔다가 돌아왔다.”, “두 사신은 만공단에 올라가서 주악(奏樂)으로 소일하고 돌아왔다.”, “두 사신이 북문루(北門樓)에 올라가서 손님을 전송하고, 이어서 만공단에 올라 음악을 들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조선 후기에 오면 만공단이 제사를 지내는 용도로 사용되기 보다는 통신사 일행이 부산에 머무는 동안 주악을 즐기는 곳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의의 및 평가]

만공단은 정유재란 때 조선을 구원하기 위해 파견된 명나라 장수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제단이다. 그러므로 만공단을 노래한 한시는 전쟁의 상흔을 고스란히 간직한 부산의 전쟁 사적(史籍)이며, 국방 요충지를 노래한 대표적인 고전 문학 작품이라 하겠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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