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00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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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多大浦-古典文學 |
영어의미역 | Classical Literature Singing Dadae-po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동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권정원 |
[정의]
조선 시대 부산의 명승지 다대포를 대상으로 지은 한시 작품.
[개설]
‘다대(多大)’라는 이름이 어디에서 유래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일본의 문헌에는 이 지역이 답달(沓達), 다다라(多多羅)로 변하면서 두 개의 다(多)자 가운데 하나가 거의 비슷한 양의 단위인 크다는 뜻의 대(大)자로 변한 것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게 남아 있다. 다대포는 낙동강 하구와 바다를 끼고 있어서 예로부터 군사적 요충지인데다가 주변 풍광이 아름다워 시에 뛰어난 많은 관리들과 시인 묵객들이 이곳을 들렀고, 다대포 주변의 풍경을 읊은 시를 남겼다. 그러므로 다대포를 노래한 작품은 군사적 중요성을 부각시키거나 아름다운 자연 경관을 노래한 것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자연적·군사적 여건에 비해 현재 남아 있는 작품은 그리 많지 않다.
[다대포를 노래한 한시]
다대포를 노래한 한시는 대략 13여 편 정도인데, 시의 내용에 따라 크게 세 가지로 대별된다. 첫째, 다대포의 승경(勝景)을 노래한 시이다. 졸옹(拙翁) 홍성민(洪聖民)[1536~1594]의 「다대포운(多大浦韻)」와 「차다대포판상운(次多大浦板上韻)」, 신익황(申益愰)의 「다대포(多大浦)」, 이헌경(李獻慶)의 「다대포장관루관타어가(多大浦壯關樓觀打魚歌)」 등이 이에 속하는데, 이들은 다대포의 풍경을 직접 노래하거나 다대포에서 바라본 바다의 모습을 노래한 것이 모두 포함된다. 둘째, 군사적 요충지로서 전쟁의 상흔을 노래한 시이다.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1571~1637]의 「다대포작(多大浦作)」이 여기에 속한다. 셋째, 일본과 맞닿은 포구로서의 역할을 노래한 시이다. 죽당(竹堂) 신유(申濡)[1610~1665]의 「다대포우중(多大浦雨中)」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각각의 대표적 작품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다대포의 승경을 노래한 시: 홍성민의 「다대포운」
승풍비상불지주(乘風飛上不踟躕)[바람타고 날아올라 망설이지 않으니]
각아선동만객수(却訝仙童挽客鬚)[맞이하는 선동(仙童)이 나그네 수염을 당긴다]
하처경주래양량(何處輕舟來兩兩)[어디에서 쌍쌍이 가벼운 배타고 오는가]
봉산소식문장언(蓬山消息問檣焉)[봉래산의 소식 돛대 위에 뜬 해에게 묻네].
홍성민은 1580년(선조 13) 8월 27일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이듬해 9월 26일까지 재직하고, 다시 1590년(선조 23) 6월 7일부터 이듬해 7월까지 경상도 관찰사로 동남 해안의 방비를 점검한 적이 있는데, 「다대포운」은 이 당시 지은 것으로 여겨진다.
홍성민은 해안 방비를 점검하던 길이었기에 배를 타고 부산성을 거쳐 다대포 항구로 들어왔다. 하지만 그의 시에는 육지의 풍경에 대한 묘사가 전혀 없다. 게다가 이 시가 지어진 것은 1590~1591년 사이로 아직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이기에, 작자는 다대포를 신선이 손님을 맞이하는 곳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배를 타고 이곳으로 오면서도 망설임이 없었고, 신선의 세계에 사는 아이가 이끄는 대로 다대포 바다로 들어섰다고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가벼운 배를 타고 신선과 함께 오는 듯한 환각 속에서 그는 봉래산이 과연 어디인가를 한낮의 해에게 묻고, 바로 여기가 봉래산이라고 스스로의 마음속으로 대답하는 여유를 만끽하고 있다.
2. 군사적 요충지로서 전쟁의 상흔을 노래한 시: 이안눌의 「다대포작」
행진황모도해변(行盡黃茅到海邊)[노란 띠풀 길 끝나 바닷가에 이르니]
괴성뇌락단인연(壞城牢落斷人煙)[무너진 성 쓸쓸하고 인가는 끊어졌네]
명파직접만아도(溟波直接蠻兒島)[바다 물결 곧바로 오랑캐 섬에 닿아]
나졸상경가객선(邏卒常驚賈客船)[나졸들은 장삿배에도 늘 놀라네]
고국일천증입리(故國一千增廿里)[고향은 일천리에 이십 리를 더하고]
상친팔십소삼년(孀親八十少三年)[홀어머니는 팔십에서 삼년이 적네]
고신차지두감백(孤身此地頭堪白)[외로운 몸 여기서 늙어 감을 견디는데]
황대한림청만선(況對寒林聽晩蟬)[건너편 찬 숲엔 늦은 매미소리조차 들리네.
이안눌이 동래 부사를 역임한 것은 1608년 2월에서 1609년 7월까지이다. 이때는 임진왜란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로, 전쟁의 상흔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 시에서도 이안눌은 왜군의 함락에 무너진 성(城)과 복구되지 않은 인가(人家)를 잘 묘사하고 있다. 노란 띠풀과 늦은 매미 소리라는 표현을 통해 계절이 가을임을 알 수 있으니, 아마도 1608년 가을로 접어드는 시기인 듯하다. 다대포 바다는 일본과 가까운 곳이라 병사들은 장사꾼의 배만 봐도 왜군이 쳐들어올까 놀라고, 자신은 80세 가까운 노모를 두고 있지만 고향에서 천 리 떨어진 변방에서 벼슬살이 하고 있는 처지를 안타까워하고 있다.
3. 일본과 맞닿은 포구로서의 역할을 노래한 시: 신유의 「다대포우중」
고루근사안(古壘近沙岸)[옛 성이 모래 언덕에 가까우니]
모조련수루(暮潮連戍樓)[저녁 밀물이 수루에 맞닿는구나]
조서연제수(鳥棲烟際樹)[새들은 인가 옆 나무에 깃들었고]
인와우중주(人卧雨中舟)[사람은 비오는 배 안에 누워 있네].
수국풍림암(水國楓林暗)[물 나라엔 단풍 숲이 컴컴하고]
산전맥수추(山田麥穗秋)[산밭엔 밀 이삭 익으니 가을이구나]
동행만리외(東行萬里外)[동으로 만 리 밖에 가는 길]
수절차엄류(愁絶此淹留)[예서 오래 묵자니 시름을 어이할까].
이 시는 작자 신유가 1643년(인조 21) 통신사(通信使)의 종사관으로 뽑혀 일본에 갈 때 부산에 머물면서 지은 것이다. 통신사 일행은 2월 20일 서울을 출발하여 부산에 4월 초에 도착하였다. 원래 일정대로라면 부산에서는 한 달 가량 머물고 떠나야 했는데, 비가 와서 일본으로 떠나지 못하고 다대포 포구에 머물러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새는 인가 옆 나무에 깃들어 있고, 자신은 비 오는 배 안에 누워 있다’고 표현하며, 자신의 신세를 새의 신세에 빗대고 있다. 더구나 그가 다대포에 머문 것은 4월 초로 가을과는 계절이 맞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단풍 숲’과 ‘밀 이삭 익는 가을’ 등의 표현을 쓴 것은 제때 떠나지 못하고 무작정 기다려야만 하는 자신의 심경을 쓸쓸한 가을이라는 이미지에 이입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만 리 밖 일본으로 떠나야 하는 몸이 떠나지 못하고 오래도록 머물고 있으니 이 시름을 어이할까라고 노래한 것이다.
[의의 및 평가]
다대포는 예로부터 군사적 요충지였으며, 임진왜란의 첫 전승지가 바로 다대포 전투였다. 따라서 다대포의 승경을 노래한 작품 역시 의미가 있지만, 다대포를 노래한 고전 문학은 전쟁의 상흔을 생생히 보여 주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