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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장을 노래한 고전 문학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0039
한자 機張-古典文學
영어의미역 Classical Literature Singing Gijang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기장군
시대 조선/조선,근대/개항기
집필자 황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사항 시기/일시 조선 전기 - 기장현 방문
특기사항 시기/일시 조선 전기 - 기장현 방문
특기사항 시기/일시 조선 후기 - 기장현 적거(謫居)
특기사항 시기/일시 조선 시대 - 기장현 적거
특기사항 시기/일시 조선 후기 - 기장현 적거
특기사항 시기/일시 조선 후기 - 기장 현민
특기사항 시기/일시 조선 후기 - 기장 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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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기사항 시기/일시 조선 후기 - 기장 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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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기사항 시기/일시 조선 후기 - 기장[차성]
특기사항 시기/일시 조선 후기 - 기장 현민
특기사항 시기/일시 개항기 - 기장 현민
특기사항 시기/일시 개항기 - 기장 현민
관련 장소 기장군 - 부산광역시 기장군 일대

[정의]

조선 전기부터 개항기에 이르기까지 부산의 기장을 대상으로 한 한시나 산문 등의 문학 작품.

[개설]

기장(機張)이라는 지명은 서기 757년(경덕왕 16)부터 사용되었고, 고려 때 와서 차성(車城)이라는 별호를 나라로부터 받아 사용하였다. 기장과 관련된 시문학은 조선 전기 기장현(機張縣)을 방문한 서거정(徐居正)[1420∼1488]으로부터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1464~1498]과 유배자인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1587~1671], 약재(藥齋) 고두문(高斗文), 지호(芝湖) 이선(李選)[1632~1692], 효전(孝田) 심노숭(沈魯崇)[1762~1837], 기장 현민이었던 오정(鰲亭) 김방한(金邦翰)[1635~1698], 월천(月泉) 신오(辛澳)[1714~1786], 추파(秋坡) 오기영(吳璣泳), 가산(珈山) 정인준(鄭寅準)[1858~1933], 삼사당(三思堂) 송덕영(宋悳永) 그리고 기장 현감이었던 권적(權擿), 윤학동(尹學東), 송재명(宋載明) 등이 지은 시문(詩文)이 있고, 특별하게 지은이가 아직 밝혀지지 않은 기행 가사 「차성가(車城歌)」 등이 전해 오고 있다.

[기장을 노래한 한시]

기장을 구체적으로 노래한 가사는 「차성가」이고, 기장 지역과 관련된 각종 한시는 50여 수가 넘는다.

1. 서거정의 「기장의 관사에서 남쪽을 바라보고 지은 시」

구치병여노상겸(驅馳病與老相兼)[병든 몸으로 말을 몰아 달려온 늙은 재상이]

래좌동영라권렴(來坐東楹懶捲簾)[와서 앉아 동쪽 기둥의 발을 힘들게 걷어 올리고]

낙일동운유념념(落日凍雲猶念念)[해질 무렵 눈 내릴 구름은 오히려 생각을 더 나게 하며]

미풍소우경섬섬(微風小雨更纖纖)[산들바람 가는 비가 더욱 가냘프고 여리게 보이구나]

산요로출양장험(山腰路出羊腸險)[산허리로 나온 길은 구불구불하여 험하고]

포구잠요마이첨(浦口岑遙馬耳尖)[바닷가 멀리 산봉우리 말귀 같이 뾰족하다]

적막객회비영야(寂寞客懷悲永夜)[쓸쓸한 손님 회포는 긴 밤을 슬프게 하는데]

성문비고복소엄(城門鼙鼓服宵嚴)[성문의 북소리는 밤의 한기를 물러나게 하네].

조선 전기 학자인 사가정(四街亭) 서거정이 기장에서 지은 칠언 율시의 한시이다. 서거정이 어떤 연유로 기장에 왔는[鼓角寒聲報日昬]지는 알 수 없으나 지금의 기장초등학교 자리가 조선 시대 객사였는데, 서거정은 이곳에서 멀리 송정으로 넘어가는 고갯마루가 보이는 곳을 배경으로 노구(老軀)의 자신에 대한 신세를 한탄하며 지은 시이다.

2. 윤학동의 시

1) 「공진루는 현의 성곽 남문으로: 현감 윤학동의 시[拱辰樓 今縣城南門 縣監尹學東詩]」

고곽의산진해문(孤郭依山鎭海門)[산에 기댄 외로운 성곽 바닷가를 진압하고]

가진화함계전촌(駕津畵艦繫前村)[가진(駕津)의 그림배들은 앞마을에 매어 두네]

북망신극미첨원(北望宸極迷簷遠)[북쪽으로 궁궐 보며 처마는 아득히 멀고]

남공창명요체훤(南控滄溟繞砌喧)[남쪽으로 바다 당겨 섬돌을 둘렀네]

봉도반선회속려(蓬島伴仙灰俗慮)[신선 사는 봉래섬엔 티끌 생각 끊어졌고]

회양와급괴군은(淮陽臥汲愧君恩)[회양(淮陽)의 급암(汲黯)은 군주 은혜 부끄럽네]

빙란천객수잔납(憑欄遷客愁殘臘)[난간에 기댄 나그네 섣달에 시름겨운데]

고각한성보일혼(鼓角寒聲報日昬)[차가운 고각 소리 저물녘을 알려 주네].

이는 1748년(영조 24) 윤 7월에 부임하여 다음 해 10월에 복직되어 돌아간 윤학동 현감의 칠언 율시의 한시이다. 기장 읍성의 남문인 공진루에서 당시 기장현이 왜국를 접한 변방으로 군사적인 요충지이며 중요한 관문이라는 것을 알려 주고 있다.

2) 「현감 윤학동이 차운한 시(縣監尹學東次韻)」

빈해위종병차겸(濱海危蹤病且兼)[바닷가 위태로운 신세 병까지 들고]

누창잔납나개렴(樓牎殘臘懶開簾)[섣달에 누각 창문에는 발 걷기도 게을러라]

조생죽도구풍급(潮生竹島驅風急)[조수 이는 죽도(竹島)에는 바람이 급히 몰아가고]

무파봉산득월섬(霧罷蓬山得月纖)[안개 걷힌 봉산(蓬山)에는 달빛 가늘게 비치네]

보석쌍봉심상병(報夕雙烽心上炳)[저녁 알리는 쌍봉(雙烽) 마음은 위로 빛나고]

공진삼각몽중첨(拱辰三角夢中尖)[임금 생각 삼각산(三角山)은 꿈속에도 또렷하네]

영운욕동강리노(嶺雲欲凍江籬老)[고개 구름 얼어서 강가 울타리도 쇠잔한데]

수살한위세모엄(愁殺寒威歲暮嚴)[근심 속에 차가운 날씨 세밑은 엄하여라].

이는 기장 현감 윤학동이 서거정의 시를 차운(次韻)하여 지은 칠언 율시의 한시이다.

3. 김건의 시[縣監金楗詩]

투한등망읍남문(偸閑登望邑南門)[한가한 틈타 고을 남문에 올라 보니]

잔곽소조좌우촌(殘郭蕭條左右村)[성곽은 초라하고 좌우에는 마을 늘어섰네]

함외차아산세고(檻外嵳峩山勢固)[난간 너머에는 우뚝 솟은 산세]

루전활발수성훤(樓前活潑水聲喧)[누각 앞에는 콸괄콸 물소리]

분우북궐승군명(分憂北闕承君命)[궁궐에서 군명 받들어 목민관이 되고]

갈력동주보국은(竭力東洲報國恩)[동쪽 고을에서 힘을 다해 은총에 보답하네]

종일빙란간사곡(終日憑欄看射鵠)[종일토록 난간에서 활 시합 구경하는데]

서잠불각점황혼(西岑不覺漸黃昏)[서산에는 어느덧 황혼이 찾아드네].

위 시는 1753년(영조 29) 12월에 기장 현감으로 부임하여 다음 해 9월에 파직된 김건이 윤학동의 「공진루는 현의 성곽 남문으로: 현감 윤학동의 시」 시를 차운하여 지은 칠언 율시로 역시 기장현이 남쪽 변방의 중요한 요새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4. 윤선도의 시[시비(詩碑)에 새겨진 시]

1) 「동생과 헤어지면서 지어 준 2수[贈別少弟 二首]」

공의 아우 선양이다. 스스로 주를 달기를, 금계(金雞)[신유년인 1621년을 가리킴] 8월 25일에 전송하며 삼성대까지 왔을 때 지어 주었다[公庶弟善養, 自註金雞仲秋念五日 送至三聖臺而作].

약명신천격기산(若命新阡隔幾山)[너 뜻을 따르자니 새로운 길 얼마나 많은 산이 막을 것이며]

수파기나난생안(隨波其奈赧生顔)[세파를 따르자면 얼굴이 부끄러워짐 어찌 하리오]

임분유유천행루(臨分惟有千行淚)[이별을 당하여 오직 천 갈래 눈물만이]

쇄이의거점점반(灑爾衣裾點點斑)[너의 옷자락에 뿌려져 점점이 아롱지네].

* 수파(隨波): 당시에 돈을 바치고 죄를 면하는 일이 있었다. 세파를 따른다[隨波]는 것은 이 일을 가리킴[時有納鍰自贖之事隨波卽指此也].

아마비비여마지(我馬騑騑汝馬遲)[내 말은 내달리고 네 말은 더디건만]

차행나인물추수(此行那忍勿追隨)[이 길 어찌 차마 따라오지 말라고 할 수 있으랴]

무정최시추천일(無情最是秋天日)[제일 무정한 건 이 가을 해이니]

불위이인주소시(不爲離人駐少時)[헤어지는 사람 위해 잠시도 멈추지 않네].

위 시 2수는 고산 윤선도가 1621년(광해군 13)에 동생 선양과 지금의 기장군 일광면 삼성리에 소재한 삼성대에서 이별하면서 지어 준 것으로 ‘고산 선생 시비(孤山先生詩碑)’에 새겨져 있다. 윤선도 평생에 곧은 선비 정신과 그의 절개를 나타내는 수준 높은 글로 평가받고 있다.

2) 「병중에 회포를 보내다(病中遣懷)」

거이어매기여오(居夷禦魅豈余娛)[편히 살기 위해서 도깨비를 막음이 어찌 나만의 즐거움이랴]

연국회선매자우(戀國懷先每自虞)[나라를 사랑하는 마음 먼저 가졌기에 모든 것이 절로 걱정이네]

막괴유산이주고(莫怪踰山移住苦)[산 넘어 옮겨 사는 괴로움을 가련하게 여기지 마오]

망경유각일중무(望京猶覺一重無)[서울 바라보니 도리어 막힘이 없구나].

위 시는 고산 선생 문집에 실려 있는 것으로 앞의 2수와 함께 2005년도에 기장문화원에서 일광면 삼성리에 있는 삼성대에 ‘고산 선생 시비’를 건립하고 새긴 글 중의 하나이다.

5. 이선의 시

1) 「웅촌을 시로 읊음(熊村偶吟)」

관한동부절진훤(寬閒洞府絶塵喧)[한적한 산골마을 시끄러운 속세와 끊어져 있고]

예일상마자일촌(翳日桑麻自一村)[햇빛 가린 뽕과 삼밭 저절로 한 마을을 이루어]

산외부지풍우악(山外不知風雨惡)[산 밖의 모진 비와 바람 알지 못하니]

세간금유무릉원(世間今有武陵源)[세상에는 이곳에 무릉도원이 있다 하네].

2) 「방매(訪梅)」

일수매화침벽계(一樹梅花枕碧溪)[매화 한 나무가 푸른 시냇물에 걸쳐져 있는데]

기다풍우색처처(幾多風雨色悽悽)[얼마나 많은 비와 바람에 그 빛이 바랬는지]

금래위전등라진(今來爲剪藤蘿盡)[이제 와서 자르려함은 등라를 못 오르게 함이고]

삼후청향도일서(三嗅淸香到日西)[삼후의 맑은 향기도 지는 해에 가까워 가네].

위 시 2수는 1689년(숙종 15) 참판 이선이 기장으로 유배 와서 지은 시 중에 2수이다. 첫 수의 웅촌은 지금의 기장군 철마면 웅천리 중리 마을로 그곳에서 지금의 연구리 마지 마을 쪽으로 보고 지은 내용이다. 둘째 시에서는 적거 생활을 하는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고 있다.

6. 기타

1) 「현감 권적이 서사가의 시에 차운함(縣監權𥛚次徐四佳韻)」

병정기한여상겸(病情羈恨與相兼)[병든 마음에 나그네살이 한까지 겹쳐]

심폐아문하석렴(深閉衙門下席簾)[관아 문 닫아걸고 주렴을 드리웠네]

복사삼동시원만(鵩舍三冬時晼晩)[삼동이라 귀양살이 한 해는 저물어가고]

만천반야우렴섬(蠻天半夜雨廉纖)[남방 궁벽한 땅 한밤중에 비는 가늘게 내리네]

유견여몽진관외(猶牽旅夢秦關外)[저 멀리 진관(秦關)은 나그네 꿈이 이끌리고]

능할수장초수첨(能割愁腸楚峀尖)[뾰족한 초산(楚山)은 능히 수심을 에이누나]

전전한금잉불매(轉展寒衾仍不寐)[차가운 이불 덮고 뒤척이며 잠 못 이루는데]

각첨쇠빈효상엄(却添衰鬂曉霜嚴)[센 귀밑머리에 새벽 서리 내리네].

위 시는 1733년(영조 9) 이조 참의에서 58세에 기장 현감으로 부임한 권적이 맨 앞의 서거정의 시를 차운하여 지은 칠언 율시로 자신의 신세를 걱정하고 있는 내용이다.

2) 「양산 군수 김이만이 시랑대에 올라 사가의 시운을 써서 지음(梁山郡守金履萬 登侍郞臺 用四佳韻)」

천용해색벽상겸(天容海色碧相兼)[하늘색과 바다 빛은 모두 서로 푸른데]

왕왕어주대죽렴(往往漁舟帶竹簾)[이따금씩 고깃배는 대나무 발을 둘렀네]

부감용추천인흑(俯瞰龍湫千仞黑)[천 길 시커먼 용추(龍湫)를 굽어보고]

평간마도일미섬(平看馬島一眉纖)[눈썹처럼 작은 대마도(對馬島)를 건너보네]

세공사재사광정(洗空渣滓沙光淨)[티끌은 모두 씻겨 나가 모래 빛은 깨끗하고]

마진비부석골첨(磨盡肥膚石骨尖)[살점은 다 떨어져 나가 바위 뿌리 뾰족하네]

락일고대풍만리(落日高臺風萬里)[저물녘 높은 시랑대에 만 리 바람 부는데]

갱호여작파한엄(更呼餘酌罷寒嚴)[남은 술 다시 가져다가 한기를 쫓아보네].

이 시도 양산 군수 김이만이 서거정의 시를 차운하여 지은 칠언 율시의 한시이다.

3) 「순무어사 유수의 시」

풍정파심경면개(風靜波心鏡面開)[바람 잦은 깊은 바다 거울처럼 펼쳐지고]

송림상뢰식부애(松林爽籟息浮埃)[시원한 솔숲 바람 세상 티끌 잠재우네]

귀참온재청소월(歸驂穩載淸霄月)[돌아가는 말은 맑은 달빛 편안하게 등에 실었는데]

절승전당만거래(絶勝錢塘萬炬來)[전당강 일만 횃불 오듯 너무 아름다워라].

위 시는 순무어사(巡撫御使) 유수(柳綏)가 기장 지역을 시찰하면서 그 마음을 읊은 칠언 절구의 한시이다.

4) 「홍자원의 시」

해장천욕진(海長天欲盡)[바다가 기니 하늘이 끝나려 하고]

산원안증명(山遠眼增明)[산이 머니 눈이 더 밝은 것 같구나].

5) 「이인전의 시」

어점취연기(漁店炊烟起)[어촌 주막에 밥 짓는 연기 오르고]

촌원죽순생(村園竹筍生)[마을 동산에 죽순이 돋는다].

위의 시 2수는 홍자원(洪子圓)과 이인전(李仁全)이 지은 것으로 『기장군지』에 실려 있는 내용이다.

[기장을 노래한 산문]

1. 김일손의 「기장현관기(機張縣館記)」

영남의 67곳 크고 작은 군현[고을]은 모두 산고개를 경계로 바둑돌을 펼쳐 놓은 모습이다. 바다에 연(沿)하여 읍이 된 크고 작은 군현[고을] 또한 20여 곳이다. 바닷가 고을의 민속은 모질기가 오랑캐와 같은데, 해산물 공납은 산간·들녁 고을보다 극심하다. 파도의 경계(警戒), 바다의 수비 또한 태평에 물들어서 그 외침의 방어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이 때문에 해변 고을을 다스리는 관리는 문무의 재능을 갖춘 인재가 아니면 대개 직무를 수행하는 데 한가할 여유가 없다.

기장은 오래된 고을이다. 바다에 접해 있어 작고 쇠잔하다. 본래 신라 때는 갑화양곡(현)이다. 옛날 동래군에 통솔되었다가, 그 후 양주에 소속되었다. 고려 현종 때 울주에 옮겨 소속되었다가, 조선에 들어와 (기장)현이 되었다. 그 작고 그 쇠잔함이 이와 같고, 그 오래 됨 또한 이와 같은데도, 예전 일은 기록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으니, 어찌 또한 땅이 좁아 그렇게 된 때문이 아니겠는가.

성화 을사년(1485, 성종 16) 여름에 훈련원 습독관인 여흥 민관(閔寬) 공이 이 군현[고을] 현감으로 부임하여, 옛 객관(客館)이 저습하고 좁으며 낡고 무너질 듯한 것을 보고, 임무를 받고 왕명을 받들고 국왕을 모시는 사람에게는 부족하여 객관을 새로 짓고 싶어 했다. 마침 흉년에 시달리어 역사(役事)를 할 여력이 없었다. 4년이 지난 무신년(1488, 성종 19)에 풍년이 들어 마침내 옛 객관의 북쪽에 터를 잡아 건물을 줄지어 건립하니, 동서의 건물은 크고 작은 것을 합하여 20여 칸이나 되었다. 가혹하지도 소란스럽지도 않고, 일을 할당하여 권장하는 데도 정도가 있어서 4개월 만에 공사를 끝냈다. 또 이듬해 경술년(1490, 성종 21)에 공(公)이 교체될 즈음, 내게 편지를 보내어 기문을 지어줄 것을 청하였다.

아! 공은 옛 사람이 하지 못한 일을 힘써 잘 해내었다. 근무하는 틈을 내고, 그 모진 사람들을 부려서, 크고 큰 건물을 이에 시일을 넘기지 않고 완공하였다. 일 처리에 질서가 있는 사람이 아니면 그것을 해낼 수 있겠는가. 이는 글로 남길 만한 일이다.

저 아무 공적 없이 사익(私益)만 도모하는 자나, 또는 나약하여 공적을 쌓지 못하는 자는 말할 필요도 없고, 공역(工役)을 시행하면서 실마리가 없어서 정사는 이루지 않고 백성의 신뢰도 얻지 못하면서 그들을 토목공사에 내몰아 농사철을 빼앗아서, 백성의 분노만 초래한 자는 우리 공과 비교하면 어찌나 큰 차이가 난다.

내가 예전에 노모(老母)를 가마에 모시고 봉산(蓬山, 동래)에 온천하러 갔을 때 처음 공을 만났다. 사람됨이 훌륭한 한 대장부여서, 한번 보고 그의 범상치 않음을 마음으로 알았다. 공은 거문고를 가지고 동래에 와서 당(堂)에 올라 노모(老母)에게 절하고 작별한 적이 있다. 공은 나와는 친척처럼 절친한 교분이 있다.

지금 와서 기문을 청하고, 또한 공이 글과 풍류를 좋아함을 가상하게 여겨 거듭 사양하지 못하였다. 그 건물의 장대함, 단청의 꾸밈, 풍경의 어울림은 내가 한번 눈여겨 보고서는 그 섬세함을 글로 다 쓰기 어렵구나.

홍치 경술년(1490, 성종 21) 7월 16일 분성 김일손이 기문을 짓다.[嶺之南大小六十七官 緣嶺而棋布者皆是也 幷海而爲邑者 又大小二十餘海隅民俗獰同蠻獠海錯上供劇於山野而波警海戍又不可狃昇平而疎其防虞以此吏海邦者 非文武能幹之材盖應務之不遑矣 機張古縣也傍海而小且殘本新羅甲火良谷舊領於東萊郡後屬之梁州高麗顯宗移屬蔚州入本朝爲縣其小也其殘也如是 而其古也亦如是前此無一可紀者 豈亦地之使然耶 成化乙巳夏訓練院習讀官驪興閔侯寬出監是縣 視舊客館湫隘頹弊 不足以奉使承命尊主人欲新之方憔荒政不可擧贏越四年戊申歲熟乃卜地於舊館之北 列營廳事 東西軒屋大小合二十餘架不苛不擾勸課有程四閱月而斷手又明年庚戌侯將受代 以書抵余請書之 噫 侯能奮事功於昔人之所未能 瞯其務之隙役其人之獰 渠渠廈屋 曾不逾時 非措置有序者 能之乎 是可書也 彼無狀自營或懦弱不續者不容已至於役施無緖政未成民未信而驅之土木奪農時招衆怒者 視吾侯一何遠也 余昔扶板輿湯沐蓬山始與侯合爲人魁梧一丈夫一見心知其不凡也 侯隨琴東萊上堂拜老母而辭焉 侯於余有通家之分矣 今來索記又嘉侯之能喜文雅不復辭其棟宇之壯丹靑之飾風景之會余未得一寓目而書其纖悉也. 弘治庚戌七月旣望盆城金馹孫記].

위 글은 조선의 4대 사화(士禍) 중 하나인 무오사화가 일어나기 8년 전인 1490년(성종 21) 7월에 탁영 김일손이 기장을 지나가면서 기장현에 대하여 쓴 글로 당시의 기장현의 관에 대한 것을 보다 소상하게 적고 있다.

2. 김방한(金邦翰)의 「걸하미면환속소(乞下味面還屬疏)」

엎드려 아뢰옵니다. 신 등이 기거하는 기장현은 땅이 협소하고 토지가 척박하며, 읍이 쇠잔하고 백성이 빈곤하여 스스로 자립할 수가 없어 때로는 양산(梁山)에 부속시키기도 하고, 때로는 울산에 부속시키기도 하고, 그 사이에는 동래(東萊)에 이속시키기도 하였다가, 만력(萬曆) 정사년(丁巳年)[1617년, 광해군 9]에 복설하였습니다. 본 현은 동서배후에는 태산(泰山)이 있어 들[野]에는 곡식을 키울 토지가 부족하고, 백성들은 생계를 꾸려갈 거처가 부족합니다. 전선(戰船)이 이속된 후에는 더 더욱 피폐해져 불쌍하고 쇠잔한 백성들이 살아갈 수가 없어 유리걸식함이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 요즘의 정상은 참혹하여 말로 다 할 수 없는데, 만약 은혜를 베풀고 보존시키는 대책이 마련되지 않으면 이 어찌 화평한 기운을 손상시키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울산(蔚山)의 남쪽, 기장의 북쪽에 쌍후(雙堠)[두 개의 이정표]가 있는데, 이는 곧 들을 구획하고 주(州)를 나눌 때에 표를 세워 경계를 정한 것입니다. 피차의 경계 선상에는 모두 백성들이 거주하고 있는데, 저쪽은 울례리(蔚禮里)라 하고, 이쪽은 장안리(長安里)라 이렀는데, 대개 ‘울(蔚)’자와 ‘장(張)’자로서 피차를 구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쌍후의 터는 눈이 있는 이라면 모두 보았고, 양쪽 마을의 명칭은 귀가 있는 이라면 모두 들었으니, 이것은 진실로 속일 수 없는 것입니다. 본 현이 일찍이 울산과 합쳐졌었는데, 복설된 뒤까지도 장안리 이북의 하미면(下米面)이 울산에 혼입되어 있습니다.

계사년(癸巳年)[1713년, 숙종 39]에 이르러 읍재(邑宰)가 도신(道臣)에게 피차를 분명히 조사해 줄 것을 진소(陳疏)하였습니다. 경계를 정하는 날에 사유를 갖추어 계문(啓聞)하였으나 묘당(廟堂)에서 사리(事理)를 들어 계(啓)를 막은 즉, 울산 백성들이 어찌하지 못하다가 해를 경과해 가며 서울에 머물면서 동서(東西)로 이리저리 도모하고 부탁하였으며, 기해년(己亥年)[1719년, 숙종 45] 분갱(分更)할 때에는 또 상소를 묘당(廟堂)에 올리니, 묘당에서는 본도(本道)에 물어 확인하지 않은 채 직접 울산에 하미면(下味面)을 획급하였습니다.

본 현의 백성은 인구가 적고 역(役)이 번중하여 지탱하고 보호하기 어려운 사정을 나라 안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습니다. 금번 암행어사의 안행(按行) 시에 저간의 사정을 빠짐없이 알았을 것이니 일일이 아뢰는 것은 불필요할 것입니다. 울산은 토지가 비옥하고 백성이 많을 뿐만 아니라 그 넓이가 24개면에 이르는데, 본 현은 단지 3개면에 불과합니다.

인구를 계산하고 전결(田結)을 비교하면, 본 현을 통틀어 말하더라도 오히려 울산의 1개면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약자를 구제하고 넘어지는 것을 붙들어 주는 도리(道理)가 잘못됨이 이와 같습니다. 하물며 피차의 경계 남북의 이정표와 ‘장’ 자와 ‘울’ 자 명칭에서까지 이처럼 분명하게 드러남이겠습니까? 이것은 공도(公道)가 아님이 없음에도 사람들이 사정(私情)을 따르고, 저들은 강하고 이쪽은 약하여 세력이 서로 대적치 못함으로 말미암아 이르게 된 것입니다. 본 현의 형세는 한 가닥 터럭발로 천근[千鈞]의 무게를 끄는 것과 같아서 백성들의 곤궁함이 이미 극에 이르렀사오니, 만약 이때에 변통(變通)을 얻지 못한다면 금번의 농절기(農節期)를 감당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두려움으로 천리를 행하여 부월(斧鉞)의 처벌을 피하지 않고 뇌정(雷霆)의 위엄을 무릅쓰며 천지부모(天地父母) 앞에 호소하오니, 지금 전하의 유신(維新)의 때에 묘당으로 하여금 피차간의 형세를 참작하게 하고, 전후 문서를 살피게 하시어 한결같이 정해진 경계를 따라 위의 하미면을 특별히 본 현에 환급시켜 주심으로써 구구한 백성들로 하여금 화육(化育)의 은전(恩典)을 입게 하시고, 큰 것이 작은 것을 삼키는 탄식이 없게 해 주십시오. 천만번 두려워하며 간절히 바랍니다[伏以臣等所居機張爲縣地陜而土瘠邑殘而民貧不能自立或附於梁山或附於蔚山中移於東萊萬曆丁巳乃復設邑東西不過二十里南北不過三十里前臨大海後背泰山野乏生穀之土民無容業之處自戰船移屬之後尤爲罷廢哀我赤子不能自存轉丏流亡指不勝摟此間景狀慘不忍言若無推施保合之道則此豈非感傷和氣者乎蔚山南機張北有雙堠此乃畫野分州時立標定界者者也彼此界邊俱有民居彼則曰蔚禮里此則曰長安里盖以其蔚字張字區別彼此之意也雙堠之基有目者皆見兩里之名有耳者皆聞此固不可誣者而本縣曾合於蔚山及其復設之後長安以北下味面混八於蔚山至癸巳邑宰陳疏道臣明査彼此定界之日具由 啓聞自廟堂據理防啓則蔚山民人等無可奈何經年留京東圖西囑己亥年分更又投狀於廟堂不爲査問於本道直爲割給於蔚山本縣之民民鮮役煩難支難保之狀國人之所共知今番繡衣按行之時備諳此間事情不必縷縷蔚山則不但土厚民衆其廣至於二十四面本縣則只是三面而計其人口較其田結擧一邑而言之猶不及蔚山之一面其在濟弱扶傾之道不宜如此況彼此境界南北標堠張蔚名稱若是其分明者乎此無非公道人循私情而彼强此弱勢不相敵之致也本縣形勢正如一髮之引千鈞而一邑生民之困悴己至十分地頭如未及此時邊通則更無可爲當此農節千里裹足不避斧鉞之誅敢冒雷霆之威疾呼於天地父母之前及令 聖化維新之日令廟堂參商彼此形勢査考前後文書一從定界上項下味面 特許還給使一區生民得蒙一視化育之恩典俾無以大呑小之歎千萬屛營祈懇之至].

「걸하미면환속소」는 1599년(선조 32) 임진왜란이 끝나고, 조선 정부에서는 기장을 폐현시키어 남쪽은 동래로 북쪽 지역은 울산으로 통폐합시켰다. 그 후 1617년(광해군 9)에 기장 읍민들의 상소로 동래로 갔던 지역은 회복시켰으나, 울산으로 갔던 북쪽 지역은 1653년(효종 4) 강유후 현감이 부임하여 실지된 땅을 찾아 원래의 기장현을 회복시킬 수 있었다. 1653년 강유후 현감의 상소를 당시 기장 현민이었으며, 기장의 큰 문장가인 오정 김방한[정관면 거주]이 대필하여 쓴 글이 바로 「걸하미면환속소」이다. 이 상소문을 통하여 잃어버렸던 기장의 땅을 다시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걸하미면환속소」는 오정 선생 문집인 『오정일고록(鰲亭日稿錄)』에 실려 있다.

3. 정인준의 「수리정기(愁離亭記)」

정자의 이름을 언제 어떻게 수리정이라 마음대로 부르게 되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다만 노인들의 입으로 전해 내려오는 말을 들어보면, “옛날에 이씨 성을 가진 사람으로 벼슬은 참판을 지낸 관리가 있었는데, 그는 마음이 맑고 성품이 강직하여 굽히지 않은 까닭에 그로 인하여 유배를 당해 이곳에서 귀양 생활을 하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그는 이곳에 살면서 산과 들을 관찰하는 일에 습관이 되고 달과 이슬을 시(詩)로 읊는 것을 일삼았으며, 비록 작은 집과 작은 바위라도 이름만 있으면 바로 시를 지어 읊었고, 험한 길이나 좁은 골짜기라도 명승지라는 소문만 있으면 반드시 찾아 나서며 단 하루라도 발걸음을 쉬게 하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았다. 그리고 멀거나 가깝거나 또 평탄하거나 험한 곳이라도 두루두루 관찰하고 차례대로 돌아보며 험한 길을 다닐 수 있는 지팡이와 수레로 마을로 들어와 이 정자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고 세 번이나 감탄하여 이르기를 “아름답고 아름답도다. 내가 남쪽으로 내려온 지 십년이 되지 않았으나 가장 아름다운 곳을 얻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여러 사람들이 나를 보고 말하기를 “다만 거문산 홍류동의 아름답고 장엄함만을 내세우고 여기에 있는 정자의 기이함은 말하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치마처럼 둘러싼 산에 홀로 높은 봉우리로 드러나 있어서인지, 그렇지 않으면 미인이 그림 속 병풍에 숨어 있어서인지, 그것도 아니면 정자가 시골에 있어서 사람들이 가볍게 보아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내가 이미 즐겁게 지내기 위하여 경치를 보는 안목을 시험하려고 해서 그런 것인가?”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은 하나의 작은 산봉우리가 평원의 무성한 숲 속에 우뚝 솟아 있는 모양은 마치 물에 잠긴 거북이 같기도 하고, 형상은 꿩이 엎드려 있는 것 같기도 하며, 긴 대나무와 큰 소나무가 울창하여 높은 수레에 푸른 덮개를 덮은 것 같다. 또 봄으로 단장하고 가을로 꾸민 것 같이 뚜렷하고, 꽃으로 수를 놓은 바둑판과도 같아서 평평한 밭의 사방을 가까이서 보면 시인 묵객들이 붓으로 색을 칠한 듯 하며, 시냇물이 앞을 돌아 흐르고 있어 멀리서 보면 미인의 낮고 푸른 눈썹 같기도 하다. 미산(薇山)이 특별히 아름다워 옛날 왕안석(王安石)이 즐기던 동산과 비슷하고, 작은 도랑물이 아홉 곳에서 흘러내려 와 운곡(雲谷)의 신령스러운 곳과 같이 황홀하여 만물이 아름답고 경치가 뛰어나 참으로 세상을 등지고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사람이 거처할 만한 곳이라 하고, 또한 가히 자손들을 양육할 만한 아름다운 고장이라 하여 두 번, 세 번씩 돌아보면서 스스로 머무르게 되었다.

그리고 고을 수령과 의논하여 이곳 사람들과 좋은 날을 가리어 집을 세우고 가솔을 이끌고 정자가 있는 북쪽으로 백보쯤 되는 샘이 있는 계곡 아래의 개울 위쪽에다 자리를 잡고 살게 되었다.

날마다 한가한 사람들과 정자에 올라 같이 즐기며 돌로 단을 쌓아 뜰을 만들고, 나무에다 새겨 문 위에 걸어 놓고 바람 따라 벗을 불러 모아 지내니 비록 삼복더위 중이라도 혹독하여 찌는 듯한 더위를 느끼지 못하였고, 달빛 아래 거문고를 타는 재미는 비록 천리 떨어진 멀고 먼 타향이지만 귀양 와서 걱정 있는 사람인 것을 잊을 수 있다 하여, 이런 까닭으로 편액을 수리정이라 하였다. 그리고 송강(松江) 정철(鄭澈)[1536~1593]의 가사를 편찬하여 스스로 즐겁게 여겼다. 얼마 후에 나라의 은택이 너그럽게 돌아왔으며, 여러 차례에 걸쳐서 관직에 나오라는 명을 받았으나 사양하고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고, 그리고 장차 이곳에서 세상을 끝마침이 이러하였다. 무덤과 친척은 하늘의 이치라 사람의 정으로는 감히 제어하기 어려운 것이라 하였는데, 이렇게 억울하고 원통한 헤어짐으로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아 아! 땅은 혹 사람으로 인하여 이름을 얻게 되고, 사람 또한 땅으로 인하여 세상에 이름을 전하는 까닭과 같이 현산(峴山)은 숙자(叔子)로 인하여 이름이 나고 서촉(西蜀)은 자미(子美)로 인하여 빛을 발하였으며, 이 정자는 이 참판[芝湖 李選: 1632~1692]으로 인하여 수리정이라는 이름을 얻었도다.

그러나 이 참판의 살던 곳과 이름이나 별호 등은 없어져서 그 실상의 기록이나 원고 등이 누락되어 증빙을 할 수 없으니 애석할 따름이다.

이 참판은 어찌하여 당세에 덕망을 닦고도 훗날에 이름이나 자를 감추게 되었는지 는 우리나라의 옛 풍속에 전적으로 글만을 숭상하고 근본이나 바탕은 중요시 하지 않았던 이유로 다만 관직명만을 말하고 이름과 근본은 기록하지 아니하였던 것이리라. 내가 보니 정자의 유적지는 남아 있지만 사람의 아름다운 방명이 없음을 개탄하고, 그리고 정자의 이름은 있으나 사람의 실명은 없으므로 이에 두 어 자를 기록하여 후세인들로 하여금 정자 이름의 뿌리를 알게 하노라. 임자년(壬子年)[1912]에 가산 정인준이 짓다[亭之稱號未詳何時得擅而但聞故老遺說則右有李叅判爲官人心淸性剛以直被譴謫居于是邦癖於山水之役工於月露之詠雖蝸臺小巖有稱則卽咏鳥道峽谷聞勝則必訪足跡不肯一日休焉遠近夷險之處周觀歷覽鱗杖梯車入此洞登斯亭四顧三歎曰美哉美哉吾南來十年得第一勝區然而疇向言余者但稱文山虹洞之壯不道斯亭之奇者何也裙山獨漏於岳樓耶美人藏在於屛畵耶亭在村居居人之淺視而然歟余旣好遊欲試景眼而然歟隱然一小峰凡出於平原茂林之中形如龜沒像若雉伏竹脩松長鬱乎如高車翠盖春粧秋飾宛乎如花枰点碁田坪四圍近若騷人之注彩筆溪川前繞遠如佳人之低翠眉薇山特秀彷彿安石之別園小流九合怳惚雲谷之靈區物佳景麗眞箇隱士之攸居亦可眷子之勝區再三周顧悠然自得稽于郡宰謀於土人擇吉營屋掔家携幼卜居于亭北百步許泉谷下可溪上日興遊人登亭寓樂壇石爲階剡木爲楣得風招友雖三伏盛炎不覺酷吏之蒸人邀月彈琴雖千里遐鄕頓忘謫愁之爲客以之額之曰愁離亭松江歌詞編纂自樂少後典霈泰回地雷復蟄累蒙徵辟謝老不就若將終世於玆矣墳墓親戚天理人情之有難堪制也慨然作別掇家還故云嗚乎地或得人而稱名人或得地而傳世故峴山得叔子而稱名西蜀得子美而生色斯亭得李公而稱號然而李公之居地名號堙沒無聞記實遺稿漏落莫憑惜乎李公何其修德望於當世而鞱名字於後日也吾東中古之俗專尙文華不愛根質故只稱官號而不記名本者也吾慨嘆乎亭之有遺址而人之無遺芳亭之有名號而人之無名實故記以數字欲使後來之人知亭號之有根焉. 壬子年 珈山 鄭寅準 謹撰].

「수리정기」는 1909년(순종 3)에 기장 향교의 전교를 지낸 가산 정인준이 지금의 기장군 철마면 웅천리 중리 마을에 있는 이선의 수리정에 관한 기문(記文)이다.

4. 권적의 「등루부(登樓賦)」

가련하구나! 불우한 내 생애여, 온갖 재앙 당하여 좌천당한 근심에 남쪽으로 가는 길은 아득히 멀지만, 나를 꼭 붙잡고 놓지 않구나. 저녁나절에 궁궐에서 하직 인사드리고, 아침에 작주(雀洲)를 건넜다네. 기호(圻湖)의 너른 들판을 넘어서, 금강(錦江)의 맑은 물결을 건넜다네. 잠시 초라한 봇짐을 돌려, 고향 언덕으로 나아갔다. 북당(北堂)은 흐릿하기만 한데, 서주(西疇)는 또렷하기만 하구나. 아 엄중한 노정(路程)에 기한이 있는지라, 더 이상 머무를 수가 없구나. 부모님께 인사드려 생이별을 하여, 옛날 생각에 느꺼워 지금을 상심하였네. 형체는 외로이 문을 나서지만, 마음은 부모님 생각에 견디기 어렵구나. 황계(黃溪)를 거슬러 고개에 올라서고, 흰 구름 바라보며 눈물을 적시었네. 물가를 따라 길은 구불구불하고, 금오(金鰲)의 높은 봉우리를 우러러보네. 차성(車城) 가는 길은 아득히 멀고, 넓은 낙강(洛江)에는 파도만 일렁이네. 전원(田園)과 멀리 떨어지는 슬픔이여, 어찌 고향 생각을 그칠 수 있으랴? 영남의 높은 난간에 기대고, 궁궐의 좋은 소식 기다린다네. 양산(梁山)을 넘어 홀로 가면서, 초택(楚澤)의 쓸쓸한 노래 원망하였다네. 산은 북쪽을 막아 눈앞이 참혹하고, 물은 동으로 흘러 마음이 슬퍼지구나. 아득한 옥루(玉樓)는 그 어디인가? 뜬구름 빼곡히 궁궐을 가렸으니, 돌아보면 평소에도 도우는 이 적었으며, 힘을 빌릴 친인척도 모자랐다네. 왕도(王道)가 평탄치 않음을 알아, 집에서 소반 가운데 음식을 오래 먹었지. 사람들은 혹 의리의 분수라 하지만, 내 어찌 감히 숨길 수 있으랴? 선악의 부류 분별하려다가, 사나운 새매의 마음에 저촉되었네. 봉황은 잠깐 울다 소리를 감추고, 붕새는 날려다가 날개가 부러졌네. 술을 따라 서로 축하한 일 있었더니, 친구들은 나를 위해 장탄식을 하네. 미천한 신하는 분수를 달게 여기지만, 왕실을 생각하자니 마음이 슬퍼지네. 이에 머리 굽히고 뜻을 꺾으니, 누가 조정하여 내 뜻을 실행할까. 이에 묵은 붓을 들고 근심을 쏟아내어, 애오라지 문미(門楣) 곁에 써 두노라[憫余生之不辰 逢百罹而竄憂 念南邁之迢迢 有執我之仇仇 夕余辭乎鳳闕 朝余濟乎雀洲 越圻湖之大野 涉錦江之淸流 暫回淑裝 言就古丘 瞹瞹北堂 曆曆西疇 嗟嚴程之有所限 差不可以淹留 親愛訣而生離 焂感古而傷今 形踽踽出門 情眷眷而難任 泝黃溪而登嶺 望白雲而沾襟 遵河濱而逶迱 仰金鰲之嶔岑 車城杳而路長 洛江浩而波深 悲田園之遠隔 詎鄕思之可禁 凭嶺南之危欄 佇日下之好音 踰梁山而獨往 怨楚澤之孤吟 山北阻而慘目 水東流而愴心 玉樓邈其何處 浮雲鬱而蔽紫極 顧平昔之寡助 乏姻婭之藉力 知王道之難平 久盤中之家食 人或以義分 余莫敢乎迯匿 要薫蕕之卞別 値鷹隼之物色 鳳乍鳴而鞱舌 鵬欲擧而析翼 有酌酒而相賀 知舊爲之太息 在微臣而分甘 念王室而心惻 斯屈首而抑志 誰操柄而行臆 爰舊筆而寫憂 聊以題乎楣側].

「등루부」는 1733년(영조 9)에 기장 현감으로 부임한 권적이 지은 글이다. 권적의 관직은 현감이지만 실제 이조 참의에서 쫓겨난 인물로 당시 자신이 느낀 감정을 토로하고 있다. 권적은 그 유명한 암행어사인 ‘박문수’의 호남 관찰사 임명을 반대하다가 영조의 미움을 사게 되었고, 그 벌로 정3품 당상관에서 종6품의 기장 현감으로 강등되었다고 한다.

[의의와 평가]

기장은 한양과 천 리나 떨어진 곳으로 조선조에 귀양지의 하나였다. 기장에 귀양 온 유배인이라는 특수한 상황으로 인하여 독특한 문학인 유배 문학(流配文學)이 산출될 수 있었다. 기장현을 방문한 인물들이 기장과 관련하여 다수의 시문을 남겼다. 그리고 기장 현민으로서 학문과 학식이 높은 일부 학자들에 의하여 토착 문학(土着文學)이 창작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기장을 노래한 고전 문학 작품들은 단순히 기장의 산천경개를 찬미하는 것뿐만 아니라 조선 초기 안정되지 않은 시대에 삶에 대한 끈질긴 생명력과 애환을 담고 있다.

유배 문학은 다른 지역의 사람이 본 기장 지역의 경제, 사회, 교육, 정치 등을 알아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현감은 고을 원으로서, 기장 현민은 주민으로서 각각 나름대로의 시나 글을 창작하였다. 이러한 문학 작품을 통하여 기장 지역의 전근대 생활사를 잘 알 수 있는 동시에 기장의 전근대사를 복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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