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00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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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謙孝臺-古典文學 |
영어의미역 | Classical Literature Singing Gyeomhyeo-dae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연제구 묘봉산로 58-6[연산동 산38-1] |
시대 | 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권정원 |
[정의]
고려 후기부터 조선 후기에 이르기까지 부산의 겸효대를 대상으로 지은 한시 문학 작품.
[개설]
‘겸효대(謙孝臺)’는 신라 시대에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는 선인(仙人) 김겸효(金謙孝)가 노닐었던 곳이라 해서 그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하지만 현재 겸효대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고, 위치 또한 부산광역시 연제구 연산동 배산 성지 부근으로 추정될 뿐이다. 따라서 김겸효가 이곳에서 노닐었다는 전설만 전할 뿐 겸효대를 대상으로 직접 읊은 문학 작품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고려 후기의 문신 정추(鄭樞)[1333~1382]의 한시 1편과 조선 후기의 문신 윤훤(尹暄)[1573~1627]과 이춘원(李春元)[1571~1634], 홍위(洪葳)[1620~1660] 등이 남긴 한시가 각 1편씩, 총 4편의 시가 남아 있을 뿐이다.
[겸효대를 대상으로 한 한시]
겸효대는 부산을 찾은 많은 시인 묵객(詩人墨客)들에게 좋은 시의 소재가 되었다. 하지만 현재 남아 있는 시는 4편뿐이다. 김겸효는 신라 시대 사람이었지만, 김겸효와 겸효대에 얽힌 이야기는 고려 시대는 물론 조선 후기까지 전해졌었던 듯하다.
1. 정추, 「동래에서 옛날을 회상하며 한창려의 문집 가운데 무릉도원도 시의 운을 이용하여 짓는다-겸효대[東萊懷古用韓昌藜集中桃園圖韻-謙孝臺]」
겸효탁탁이연화(謙孝濯濯以蓮花)[겸효의 깨끗함은 연꽃과 같고]
흉탄팔황기릉진(胸呑八荒氣凌震)[가슴엔 우주 삼키고 기개는 천둥 떨게 하네]
회수긍선만호읍(回首肯羨萬戶邑)[돌아보니 만호 고을 벼슬을 부러워했구나]
편편내왕신선가(翩翩來往神仙家)[이제는 훨훨 신선의 집으로만 왕래한다네].
일찍이 정추는 겸효대에 얽힌 김겸효의 고사를 시화하였다. 이 시는 정추가 동래를 노래한 장편의 시 중 겸효대를 읊은 것으로, 전체 시의 15번째 구절부터 18번째 구절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이 시의 첫째와 둘째 구절에서는 김겸효에 대해 ‘맑고 깨끗하면서 화려한 것을 싫어하지만, 가슴에 우주를 삼키고 천둥 번개를 떨게 할 정도의 큰마음을 지닌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셋째와 넷째 구절에서는 ‘김겸효가 노닐었던 곳에 올라 보니, 자신이 벼슬을 탐내고 벼슬을 지냈던 것이 도리어 부끄럽게 느껴진다고 자책하며, 이제는 겸효의 큰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니, 스스로 마음도 한껏 커진다’고 말하였다.
정추는 1366년 공민왕 당시 최고 권력자인 승려 신돈(辛旽)[?~1371]을 탄핵했다가 동래 현령(東萊縣令)으로 좌천되었었다. 정치권력의 희생양이 된 정추는 속세를 벗어난 김겸효의 신선 같은 삶이 그리워 자주 겸효대에 올랐고, 그곳에서 바라본 풍경과 겸효의 삶을 생각하고 새삼 자신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고 노래하였다.
2. 윤훤, 「내주잡영(萊州雜詠)」
연화탁탁출청수(蓮花濯濯出淸水)[연화가 맑은 물에서 나오듯]
천고사인상사지(千古斯人相似之)[천고의 그 사람과 서로 닮았네]
겸효이승백운거(謙孝已乘白雲去)[겸효는 이미 흰 구름을 타고 가 버렸건만]
세간공견정추시(世間空見鄭樞詩)[세상에는 헛되이 정추의 시만 보이도다].
1605년 동래 부사로 부임했던 윤훤 역시 겸효대에 올라 김겸효를 회상하는 시를 남겼다. ‘맑고 깨끗한 삶을 살다간 천 년 전 그 사람, 연꽃의 맑음과 닮았네. 김겸효는 흰 구름 타고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지만, 김겸효를 노래한 정추의 시만은 아직도 남아 있구나’라고 노래하였다. 이를 통해 17세기 당시까지도 김겸효의 고사와 그를 읊은 정추의 시가 인구에 회자되었음을 알 수 있다.
3. 홍위, 「겸효대(謙孝臺)」
풍어천추거불회(風馭千秋去不回)[신선은 천년토록 떠나 다시 오지 않고]
지금유적단황대(至今遺跡但荒臺)[지금 남은 자취는 황량한 대(臺) 뿐이네]
봉산차거원상근(蓬山此去元相近)[봉래산 이곳에서 원래 서로 가까우니]
요학시시당왕래(遼鶴時時倘往來)[요학은 때때로 노닐며 왕래하는구나].
1657년 동래 부사로 왔던 홍위의 작품이다. 요학(遼鶴)이란 한(漢)나라 때 신선술을 익혀 학이 되어 노닐었다는 정령위(丁令威)를 말하는데, 여기서는 김겸효를 가리킨다. 봉래산의 신선이 되어 노닐었다는 김겸효의 고사를 정령위의 고사에 빗대어 읊은 것이다. 이 시에서 홍위는 겸효에 대해 ‘신선은 천년이 지난 지금도 오지 않고, 그가 남긴 자취인 겸효대만 있구나’라고 아쉬운 마음을 표현하였다. 더구나 ‘남은 자취는 황량한 대 뿐이다’는 표현에서 홍위가 부사로 부임했을 당시에는 이미 겸효대가 황량하게 변하여, 신선이 노닐던 승경의 모습을 잃었던 듯하다. 하지만 ‘동해 바다에 있다고 알려진 신선의 고향인 봉래산(蓬萊山)이 부산과 가까우니, 요학이 때때로 왕래하듯 김겸효도 가끔은 여기를 찾을 만하구나’라고 노래하였다.
[의의 및 평가]
부산은 자연 경관이 아름다워 신선(神仙)과 관련된 지명이 유독 많다. ‘동쪽의 봉래산’이라는 동래를 비롯하여 신선동·청학동·영선동·영주동·선동·신선대·강선대 등이 모두 그러하다. 해운대·겸효대·소하정 등도 역시 신선 전설(神仙傳說)과 관련이 있는 지명인데, 이들은 아름다운 경치와 신비스런 전설로 인해 많은 시인 묵객의 사랑을 받았다. 현존하는 시문을 통해 볼 때 겸효대를 노래한 시는 양적으로 적고, 내용도 김겸효 전설과 관련하여 그를 그리워하는 망선(望仙)의 것이 주류였다. 하지만 겸효대를 노래한 4편의 한시는 고려 시대에서 조선 후기까지 김겸효의 전설이 지속적으로 인구에 회자되며 선적(仙跡)을 노래하였음을 보여 주고 있다. 따라서 겸효대를 노래한 한시는 부산을 노래한 고전 문학 가운데 신선 사상(神仙思想), 신선 전설이 담긴 ‘탈속적(脫俗的) 인문 사적(人文史籍)’을 노래한 대표적 작품이라 평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