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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9061
영어의미역 Achiseom Village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부산광역시 영도구 동삼동 아치섬 마을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주경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자연 마을
변천 시기/일시 1906년 - 동래군 사중면 구룡동에서 동래부 사중면 동삼동으로 개편
변천 시기/일시 1910년 - 동래부 사중면 동삼동에서 부산부 사중면 동삼동으로 개편
변천 시기/일시 1944년 - 부산부 사중면 동삼동에서 부산부 사중면 동산정으로 개편
변천 시기/일시 1947년 - 부산부 사중면 동산정에서 부산부 사중면 동삼동으로 개편
변천 시기/일시 1949년 - 부산부 사중면 동삼동에서 부산시 사중면 동삼동로 개편
변천 시기/일시 1951년 - 부산시 사중면 동삼동에서 부산시 영도출장소 동삼동으로 개편
변천 시기/일시 1957년 - 부산시 영도출장소 동삼동에서 부산시 영도구 동삼동으로 개편
변천 시기/일시 1963년 - 부산시 영도구 동삼동에서 부산직할시 영도구 동삼동으로 개편
변천 시기/일시 1974년 - 한국해양대학교가 설립되며 아치섬 마을 철거
자연 마을 아치섬 마을 - 부산광역시 영도구 동삼동 아치섬 마을

[정의]

부산광역시 영도구 동삼동에 있었던 자연 마을.

[명칭 유래]

아치섬은 부산의 북항 입구에 있는 섬으로 지금은 한국해양대학교가 자리잡고 있는 곳이다. 아치섬은 『동래부지(東萊府誌)』[1740]에는 고지도(古智島) 또는 동백도(冬柏島)로 기록되어 있으며, 동쪽 해안에 떠오르는 아침 해의 아름다움이 부산에서는 제일이라 하여 조도(朝島)로도 불린다.

[형성 및 변천]

아치섬에서 1973년 조개더미가 발굴되어 신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1876년(고종 13) 개항 당시 이 섬에는 인가가 예닐곱쯤 있었다는 기록이 있어 오랜 역사를 알 수 있다.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 해군의 요새 사령부 관할로 일반인의 접근이 금지되었으나, 광복 이후 해산물 채취를 위하여 사람들이 거주하며 어촌 마을을 형성하게 되었다.

아치섬 마을이 속한 동삼동 지역은 1896년(고종 33) 경상남도 동래부 사중면 영선리가 되며 최초로 공식 동명을 갖추게 되었다. 1903년(고종 40) 동래부가 동래군으로 격하되면서 사중면(沙中面) 상구룡동(上鷗龍洞)[동삼동 상리 마을에 해당]과 하구룡동(下鷗龍洞)[동삼동 하리 마을에 해당]이 되었다. 1906년(고종 43) 동래군이 다시 동래부가 되며 사중면 동삼동이 되고, 1910년 행정 구역 개편으로 동래부가 부산부로 개편되었다.

1914년 부산부를 다시 부산부동래군으로 행정 구역을 조정하며 부산부 사중면이 되었다. 1944년 동삼동이 동산정(東山町)으로 개편되고, 1947년 광복으로 동산정이 다시 동삼동이 되었다. 1949년 부산부가 부산시로 개칭되었고, 1951년에는 영도출장소가 설치되었으며, 1957년 영도출장소가 영도구로 승격하였다. 1963년 부산시가 부산직할시로 승격하였으며, 1995년에는 부산직할시가 부산광역시로 승격하며 부산광역시 영도구 동삼동이 되어 현재에 이른다.

소규모 어촌이던 아치섬 마을은 1950년대 중반부터 갑자기 밀수 소굴로 둔갑하였다. 시내와 가깝고 교통이 편리한데다 밀수품을 육지로 운반하기 좋은 입지 조건 때문이었다. 밀수 조직은 주민을 포섭하게 되고, 밀수가 돈이 된다는 것을 안 섬 주민 대부분이 본업을 제쳐 두고 밀수에 가담하게 되면서, 아치섬은 대한민국 최대의 밀수 근거지로 불렸다. 이에 부산시에서는 1960년 2월 이곳에 세관 초소를 설치하는 등 강력한 단속 조치를 취하고, 주민의 소득 증대를 위해 1967년 방파제 건설로 육지와 연결되고, 발전기를 설치하고 어업 자금도 융자하여 바다 목장과 양식장을 설치하였다. 1974년 아치섬에 한국해양대학교가 설립되면서 거주하던 103가구 주민들을 집단 이주시키며 마을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자연 환경]

영도구 동삼동 중리 동쪽에 있는 높이 125m의 작은 섬으로 동쪽과 남쪽 해안은 기암괴석이 있는 암석 해안이며, 서쪽으로는 육지와 연결된 방파제와 매립지가 조성되어 있다.

[현황]

현재 한국해양대학교 캠퍼스가 자리 잡고 있어 마을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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