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86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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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山幕-草梁洞- |
영어의미역 | Sanmak Village[Choryang-dong]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 6동 산막 마을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류종현 |
[정의]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동에 있었던 자연 마을.
[명칭 유래]
산막(山幕) 마을[초량동]은 경부선 철도 부설 공사 때 벌채를 위한 임시 주거지인 산막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형성 및 변천]
산막 마을은 1900년대 초 일제가 경부선 철도를 부설할 때, 이곳의 우거진 나무를 베어 침목으로 쓰기 위해 인부들의 산막을 만들고, 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주막이 모여들며 형성되었다. 마을이 속한 지역은 1910년 사중면 초량동에 속하였고, 1913년 부산부에 편입되었으며, 1914년 초량동이 되었다. 일제 강점기 일본군 수송 부대인 아카즈키 부대가 이 지역을 관리하였는데, 미얀마·인도네시아·필리핀 등지로 젊은이들을 징용 보내기 전 임시 훈련소와 전쟁 물자의 야적장(野積場)으로 사용하였다.
이후 6·25 전쟁 때 부산으로 몰려든 피난민이 산막 마을에 정착하며 판자촌을 형성하였으며, 주변 판자촌과 연결되며 점차 시가지가 형성되었다. 마을이 속한 지역은 1949년 부산시 초량동, 1951년 부산시 초량출장소, 1957년 부산시 동구 초량동에 속하였다. 1963년 부산직할시 동구 초량동, 1995년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동에 속하였다.
[자연 환경]
산막 마을은 서쪽으로 수정산이 있었고, 마을 중앙에 수정산에서 발원한 초량천이 흘렀다. 초량천은 여름철 홍수 때면 범람하여 큰 피해를 입히기도 하였다. 수정산 골짜기의 경사지를 따라 형성되어 있던 마을에 피난민의 판자촌이 형성되며 흡수되어 옛 지형을 찾을 수 없다.
[현황]
6·25 전쟁으로 수정산 중턱까지 피난민의 판자촌이 들어서며, 옛 마을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현재 마을이 있던 지역에는 수정 도시 아파트 등이 들어서 있고, 부산서중학교와 동일중앙초등학교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