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86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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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石浦- |
영어의미역 | Seokpo Village |
이칭/별칭 | 돌개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부산광역시 남구 대연동 석포 마을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선석열 |
[정의]
부산광역시 남구 대연동에 있었던 자연 마을.
[명칭 유래]
석포(石浦) 마을 등하천(嶝下川)에 돌 자갈이 많아 ‘돌개’라고 불렀는데, ‘돌 석(石)’과 ‘포구 포(浦)’ 자를 합하여 석포라고 하였다.
[형성 및 변천]
석포에 대한 기록은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誌)』[1469]에서 찾을 수 있다. 기록에 따르면 이 지역에는 석포 목장이 있었으며, 말을 방목하기 위해 목마성(牧馬城)[부산 문화 회관 뒤 평정산~남부 면허 시험장 뒤의 덕숭산 일대]을 쌓았다고 한다.
마을은 1530년(중종 25)경에 동래 정씨(東萊鄭氏)가 이곳으로 이주하며 형성되었다고 전한다. 입향조(入鄕祖)는 동래성 수문장을 역임한 정복덕(鄭福德)의 아들 정춘세(鄭春世)라고 한다. 『동래부지(東萊府誌)』[1740]에는 동래부 남촌면 석포리가 기록되어 있으며, 일제 강점기에는 경주 김씨(慶州金氏)·문화 유씨(文化柳氏)가 이주해 왔고, 광복과 6·25 전쟁을 전후하여 많은 사람들이 이곳으로 이주해 와 인구가 크게 증가하였다.
1953년 부산시 대연출장소가 설치되었으며 1957년 대연동으로 명칭이 확정되었다. 1963년 부산직할시로 승격되었으며, 1973년 부산직할시 대연출장소로 승격되었다. 1975년 남구가 신설되면서 부산직할시 남구 대연동에 속하였고, 1995년 부산직할시가 부산광역시로 승격되면서 부산광역시 남구 대연동 석포 마을이 되었다.
[자연 환경]
석포 마을은 천제등(天際燈)[부산공업고등학교 북서쪽 산지 일대]과 전선등(戰線燈)[남부 운전면허 시험장 일대] 사이에 있던 한적한 포구였다. 193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폐어선의 잔해가 수상교(水上橋)[옛 동국제강 입구에 있는 다리] 부근에 산재해 있었다고 한다. 1950년대 평지등(平地嶝)[유엔 기념 묘지]과 비사등(飛蛇嶝)[부산광역시립박물관]까지 바닷물이 들어오는 포구였으며, 등하천에 선착장이 있어서 어선이 왕래할 수 있었다. 이들 구릉과 등하천을 따라 포구까지 집이 산재해 마을을 형성하였다. 현재는 북서쪽으로 우룡산이 있고, 남서쪽으로 부산항과 접해 있다.
[현황]
도시화로 포구 지역은 모두 매립되어 주거지가 되었다. 부산광역시립박물관을 비롯하여 석포초등학교·대연고등학교·대천초등학교 등의 교육 기관과 TBN 부산교통방송·유엔 조각 공원·남부 운전면허 시험장 등이 모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