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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8508
한자 安平-
영어의미역 Anpyeong Village
이칭/별칭 신명리촌,신평 마을,내평 마을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부산광역시 기장군 철마면 안평리 안평 마을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전영섭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자연 마을
변천 시기/일시 1895년 - 기장군 상서면 안평동
변천 시기/일시 1914년 - 경상남도 동래군 철마면 안평리로 개편
변천 시기/일시 1973년 - 경상남도 동래군 철마면 안평리에서 경상남도 양산군 철마면 안평리로 개편
변천 시기/일시 1986년 - 경상남도 양산군 철마면 안평리에서 경상남도 양산군 동부출장소 철마면 안평리로 개편
변천 시기/일시 1995년 - 경상남도 양산군 동부출장소 철마면 안평리에서 부산광역시 기장군 철마면 안평리로 개편
자연 마을 안평 마을 - 부산광역시 기장군 철마면 안평리 안평 마을

[정의]

부산광역시 기장군 철마면 안평리에 있는 자연 마을.

[명칭 유래]

옛날 마을 앞에 신명역(新明驛)이 있어서 신명리촌이라 하였다. 신명역 안쪽들에 있는 마을이라고 하여 안평(安平)이라 불렀다. 안평은 안쪽에 있는 들이라는 뜻으로, 차운 표기를 하면 내평(內坪)이 된다. 이곳 주민들은 언제인지 정확하지 않으나 황씨(黃氏)가 처음 이 마을 온당곡에 정착하였다고 하여 신평(新坪)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마을 주민들이 마을 뒷산에 산성을 쌓고 왜적을 방비하여 마을이 안전하고 편하게 되었다 하여 안평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형성 및 변천]

조선 전기에 신명역이 설치되면서 형성된 마을로 보인다. 옛날에는 중요한 길마다 행려에 편의를 제공하는 시설이 역원(驛院)이다. 신명역은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중마 2필, 하마 6필, 역리 73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기장현읍지(機張縣邑誌)』[1831]에 상서면(上西面) 신명리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차성가(車城歌)」에 “남경니[이] 회복하니 대명 일월(大明日月) 신명(新明)니[이]라”라고 하여 신명이란 지명이 나온다.

1895년 5월 26일 을미개혁으로 역촌 마을이 없어지면서 동래부 기장군 상서면 안평동(安平洞)이라는 마을 이름이 처음 보인다. 『경상남도 기장군 가호안』[1904]에 남면 안평리가 기록되어 있다. 43호가 살고 있으며, 집은 대개 초가 3~4칸이다. 주구단(朱九丹) 등 초가 4칸 집이 11호이다. 송씨[17호]가 가장 많이 살고, 다음이 박씨[10호], 김씨[8호] 순이다. 『경상남도 기장군 가호안』에는 대주(垈主)와 가주(家主)를 밝히고 있다. 그런데 안평리의 43호는 모두 ‘신명역대(新明驛垈)’라고 기재되어 있는 점이 주목된다. 이는 안평리가 신명역 터에 형성된 역촌(驛村)과 관련되어 형성되었음을 말해 준다.

1914년 지방 제도 개편에 따라 경상남도 기장군 상서면(上西面) 안평동 일부와 원동면(元東面) 만화동 일부가 합쳐져서 동래군 철마면 안평리가 되었다. 1973년 양산군에 속하였다. 1995년 3월 1일 부산광역시에 편입되어 부산광역시 기장군 철마면 안평리 안평 마을이 되었다.

[자연 환경]

안평 마을 북쪽으로 칼치재가 있고, 그 아래에 안평 저수지가 있다. 서쪽으로 고천천이 흐른다. 남쪽에는 감딤산이 있고 그 산 아래에 성지곡 소류지가 있다.

[현황]

안평 마을기장군 철마면 안평리 225번지 일대 16통 지역에 있는 자연 마을이다. 국도 제14호선을 기준으로 고촌 마을과 구분한다. 국도 옆에는 ‘동서 마을~안평~반송’이라고 쓰여 있는 버스 정류소가 있다. 마을 입구에 ‘안평 마을’이라고 쓴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마을 안으로 들어서면 동부산농협 신진지소가 있다. 1902년 설립된 조선예수교장로회 안평리교회가 있었지만 지금은 그 터만 남아 있다.

기장으로 가는 14번 도로를 따라 가다 보면 철마로 넘어가는 고갯길과 기장으로 가는 삼거리가 나온다. 이 삼거리에서 상달 마을 북쪽으로 형성된 저수지가 안평 저수지이다. 이 마을 옛 신명역이 말해 주듯 안평 저수지 아래쪽에 안평 차량 기지가 있다. 1998년 부산대학교 박물관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에서 조사한 안평리 유적은 6~7세기와 조선 시대 것으로 분묘 유적이 존재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마을 주업은 논농사이고, 부업으로 비닐하우스에 재배한 채소를 반송 시장동래 시장에 팔아 수입을 올리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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