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837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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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龜老室- |
영어의미역 | Gunosil Village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부산광역시 기장군 철마면 연구리 구노실 마을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전영섭 |
성격 | 자연 마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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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천 시기/일시 | 1789년 - 기장현 상서면 연구리 |
변천 시기/일시 | 1895년 - 경상남도 기장군 상서면 연구동 |
변천 시기/일시 | 1914년 - 경상남도 기장군 상서면 연구동에서 경상남도 동래군 철마면 연구리로 개편 |
변천 시기/일시 | 1973년 - 경상남도 동래군 철마면 연구리에서 경상남도 양산군 철마면 연구리로 개편 |
변천 시기/일시 | 1986년 - 경상남도 양산군 철마면 연구리에서 경상남도 양산군 동부출장소 철마면 연구리로 개편 |
변천 시기/일시 | 1995년 - 경상남도 양산군 동부출장소 철마면 연구리에서 부산광역시 기장군 철마면 연구리로 개편 |
자연 마을 | 구노실 마을 - 부산광역시 기장군 철마면 연구리 구노실 마을 |
[정의]
부산광역시 기장군 철마면 연구리에 있는 자연 마을.
[명칭 유래]
구노실(龜老室)이란 이름은 마을 안에 있던 구노곡(龜老谷)에서 나왔다. 또는 거북 바위가 있어 유래되었다는 설도 있다.
[형성 및 변천]
구노실 마을의 형성 시기는 알 수 없다. 다만 조선 시대 역사 유적지가 많이 남아 있어 조선 시대부터는 형성된 마을로 추정된다.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차성가(車城歌)」에 “구노곡이 수려하니 와여(瓦余)에 다사(多士)하고.”라고 하여 구노곡이란 지명이 나온다. 『호구총수(戶口總數)』[1789]에는 기장현 상서면 연구리로 기록되어 있으며, 1895년(고종 32) 동래부 기장군 상서면 연구동이 되었다.
1914년 동래군에 귀속되며 철마면 연구리가 되었고, 1973년 동래군이 양산군에 병합되면서 양산군 철마면에 속하였다. 1986년 양산군 동부출장소가 설치되어 그 관할이 되었다. 1995년 부산광역시로 편입되면서 기장군이 복군되어 부산광역시 기장군 철마면 연구리 구노실 마을이 되었다. 보림 마을과 구노실 마을을 합한 행정 마을을 구림 마을이라고 한다.
[자연 환경]
동쪽과 남쪽으로 철마천[장전천]이 흐르고, 북쪽으로 거문산이 있다. 서쪽으로 와여포강에서 내려와서 철마천에 합류하는 샛강이 흐른다.
[현황]
구노실 마을은 기장군 철마면 연구리 469번지 일대 6통 지역에 있는 자연 마을이다. 연안 차씨(延安車氏) 집성촌으로, 마을에 구노재(龜老齋)가 있다. 마을에 있던 철마중학교가 1993년 2월 12일에 폐교되고, 그 자리에 부산유아체험학습교육원이 들어섰다. 철마 생활 체육 시설인 철마 체육공원에는 축구장, 테니스장[2면], 게이트볼장[2면], 족구장, 관리동[312,6㎡], 다목적 광장, 주차장 등이 있다.
마을에는 서홍인 정려비(徐弘仁旌閭碑)와 효자각이 있다. 또 연봉산 기슭에 생거북 바위가 있다. 현재 바위는 거의 방치되어 풀에 싸여 있다. 이 바위에는 내려오는 전설이 있다. 마을에 살고 있던 농부가 어질고 착하게 열심히 일을 하였으나, 늘 가난하여 처자식이 배를 굶주리는 것이 한이 되었다. 그래서 연봉산 신령님께 부자가 되도록 도와 달라고 빌었다. 어느 날 꿈에 신령님이 “연봉산 기슭에 있는 거북 바위는 보통 바위와는 달리 살아 있는 거북이 돌로 변한 것이니 이를 잘 보살펴라. 그리고 그 거북 바위가 바라보는 곳에 집을 지어 열심히 일하면 큰 부자가 될 것”이라고 하였다. 현몽한 대로 하였더니 하루가 다르게 살림이 일어 큰 부자가 되었다. 부자가 되자 양반 행세를 하려고 손님을 줄줄이 청하였고, 그래서 과객이 그의 집에 득실거렸다.
어느 날 이 집 며느리가 손님들 뒤치다꺼리에 지쳐 한 과객에게 불평을 하였다. 그러자 과객이 불평을 듣고 떠나가면서, 손님을 대접하기가 싫으면 생거북의 목을 잘라 버리면 될 것 아니냐고 하였다. 이 말이 옳다고 생각한 며느리는 머슴을 시켜 생거북 바위의 목 부분을 깨뜨리게 하였다. 깨뜨려진 바위의 목에서 생혈이 번졌다고 한다. 그런 뒤부터 이 집은 과객이 없어지고 살림이 가난하여졌다. 그 농부가 살았던 집터에 차씨(車氏) 일가가 마을을 이루어 살면서 매년 제주를 정하여 정월 15일 새벽에 제사를 정성껏 모시고 있다. 마을의 주업은 벼농사이며, 부업으로 채소 및 화훼로 농가 소득을 올린다. 또한 불고기집이 많이 들어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