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68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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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玉分 |
영어음역 | Yi Okbun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강정숙 |
[정의]
현대 부산에 거주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활동 사항]
이옥분[가명]은 본관이 월성(月城)이며, 1926년[법적 생년은 1929년] 경상북도 영천에서 3남 1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영천에서 남부심상소학교를 다녔다. 울산으로 이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1937년 9월경 조선인을 앞장세운 나카무라라는 일본인에게 유괴 납치되어 울산의 하숙집 조명길에게 감금되었다가 부산과 일본 시모노세키를 거쳐 타이완 쇼카[彰化]로 연행되었다.
첫 연행지에서는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허드렛일을 하였다. 그곳에서 미래의 자신의 모습을 알고 도망하여 경찰서를 찾았다. 이후 후지모토라는 경찰 부장 집에서 무보수의 가사 보조[식모]로 지냈다. 후지모토는 1942년경 일본으로 돌아가면서 이옥분을 초등학교를 접수하여 만든 다카오 특공대 ‘위안소’로 넘겼다.
이옥분은 그때부터 군 '위안부' 피해를 입었다. 그곳에서의 이름은 하루코[春子], 고하나[小花]였다. 위안소 관리는 이타쿠라라는 군조(軍曹)[중사]와 오장(伍長)[하사] 등이 하였고, 표를 사용하였으나 대가로 돈을 받은 적은 없다. 성병 예방을 위해 정기적인 성병 검사가 있었고, 삿쿠 등을 사용하게 하였다. 군 위안부 생활만이 아니라 군인들을 위로하라는 요구에 응해 노래와 악기도 배워 연주하였으며 낮에는 세탁, 취사, 풀베기, 탄약 나르기 등의 노동을 하였다. 일본군의 명령에 즉각적으로 순종하지 않으면 구타를 당하였고, 그 생활이 고통스러워 자살을 하고 싶었으나 실행으로 옮기지는 못하였다.
1946년경 타이완에서 귀환선으로 부산에 도착하였다. 귀환 후 외가가 있던 경주에서 살다가 아이가 있는 홀아비와 결혼하였으나 남편이 일찍 사망하였다. 그 이후 부산으로 와 수십 년 동안 식당일 등을 하면서 지냈다.
이옥분은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 생활을 하였다고 밝히며 1991년 7월 『부산 일보』와 인터뷰하였다. 이때 바로 기사가 실리지 않아 주목을 끌지 못하였지만, 시기적으로 보면 흔히 최초의 피해자 증언이라는 김학순보다 빠르다. 1993년 한국 정부에 신고하여 피해자로 등록되었다. 관련 단체들과 더불어 공개 증언, 일본 정부에 피해 배상 소송 등의 활동을 하다가 2004년 사망하였다. 생전에 가명을 사용하면서 실명 노출을 원치 않았기에, 가명으로 기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