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68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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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營繕山鑿平工事 |
영어의미역 | Land Trimming Construction in Yeongseon Mountain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부산광역시 중구 동광동|영주동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차철욱 |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 초량과 일본인 거류지 사이에 있는 영선산과 영국영사관산 착평 공사.
[역사적 배경]
부산항 주변의 지형은 평지보다 산이 많았다. 용두산 주변의 일본인 거류지와 조선인 마을인 초량 사이에는 해발 50m의 영선산과 영국영사관산이 가로막고 있었다. 산 아래로는 절벽과 바다가 맞닿아 있어 도로를 만들 수 없는 지형이었다. 1905년 경부선이 개통되었으나 이 열차는 초량을 기점으로 하였다. 부산항은 1902년부터 1908년까지 두 차례에 걸친 매축으로 부산역과 부두, 세관 등 항만 교통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부산항과 초량역 사이에는 두 산이 가로막고 있어 부산항으로 철도가 연결되지 못하였다. 부산 거주 일본인은 용두산 주변의 일본인 거류지만으로는 생활 공간이 협소하여, 초량과 부산진 방면으로 거류지를 확대할 필요가 있었다. 일본 정부로서도 일본과 조선, 만주와의 인적·물적 유통을 원활히 하기 위해서는 영선산 착평 공사가 필요하였다.
[경과]
부산 거류민단은 영선산과 영국영사관산을 착평해서 초량 정차장과 부산항 사이의 바다를 매축하고 초량과 부산 일본인 거류지를 연결해서 경제적인 발전을 도모하고, 부산항의 상업 지구를 확장할 계획으로 1908년 10월 통감부 탁지부 대신에게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1909년 1월 15일 허가를 얻고, 그 해 5월에 기공하였다. 1911년 11월과 1912년 5월에 각각 설계 변경을 하고, 1913년 3월에 준공하였다. 영선산 착평 공사는 영선산과 영국영사관산을 착평하는 일과 착평한 토사와 암석으로 초량역 주변의 바다를 매립하여 새로운 땅을 확보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부속 공사로 매축지의 호안 석축, 암거, 도로, 교량과 방파제 공사도 동시에 진행하였다.
[결과]
두 산을 개착한 토석량은 약 57만 3554㎡[17만 3500여 평], 이것을 이용해 매축한 해면은 약 10만 793㎡[3만 490평], 착평과 매축으로 획득한 신시가지의 총 면적은 약 14만 8033㎡[4만 4780여 평], 이 가운데 도로 부지 약 5만 3554㎡[1만 6200여 평]을 제외하면 매각할 택지는 약 9만 4367㎡[2만 8546여 평]이었다. 총 공사비는 99만 2367원이 소요되었다. 착평한 산은 암반으로 이루어져 있어 다량의 화약을 사용해야 했으므로 공사 중 사고가 많이 발생하였다. 사망 14명[일본인 5명, 조선인 9명], 부상 75명[일본인 31명, 조선인 42명] 등 인명과 장비 피해를 입었다.
새롭게 조성된 땅에는 영정(榮町), 상생정(相生町), 동고사정(東高砂町), 서고사정(西高砂町), 장전정(藏前町) 등의 행정 지명이 부여되었다가, 영정으로 통일되었다. 영선산과 영국영사관산이 없어지고, 초량 연안이 매립되면서 초량과 부산역 사이에 철로를 부설하여 경부선이 연결되었다. 1911년 부산 역사가 준공되었다. 경부선 철로는 제1부두까지 이어져, 일본과 조선 내륙, 만주까지 사람과 물자 운반이 가능하게 되었다.
[의의와 평가]
영선산 착평 공사 부지는 도로와 주택 용지로 활용되었다. 도로에는 경부 철도가 놓였고, 2,800여 칸의 도로가 완공되어 교통이 편리해졌다. 1915년에는 전차도 운행하게 되었다. 용두산 주변으로 고립된 일본인 거류지가 초량과 부산진 방면의 조선인 마을과 곧바로 연결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조선인 거주지로의 일본인 진출이 증가하여 일본인 상업 시설과 주거 시설이 많아졌다. 일본인들의 조선인 토지와 대지 매입이 증가하였고, 상대적으로 조선인들은 토지를 많이 상실하였다. 또한 일본 본토와 대륙의 연결이 가능해졌다. 1905년 관부 연락선이 운항을 시작하였으나, 부두와 철도 시설의 연결이 불가능하여 부선을 활용하는 단계였다. 영선산 착평 공사를 계기로 일본 본토~부산항~대륙 사이에 사람과 물자의 유통이 원활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