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65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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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大韓造船公社勞動者鬪爭 |
영어의미역 | Labor Strife at Korean Shipbuilding Corp. |
분야 | 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부산광역시 영도구 봉래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노재열 |
[정의]
1987년 부산광역시 영도구 봉래동의 대한조선공사에서 일어난 노동자 투쟁.
[역사적 배경]
대한조선공사[현 한진중공업]는 노동자 수 4,800여 명의 선박 제조 업체이다. 굴지의 조선 업체라는 명성에 걸맞지 않게 이곳의 작업 환경과 임금은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엄청난 노동 강도 속에서 아침 7시 30분부터 저녁 7시 30분까지 이어지는 장시간의 노동에도 불구하고 5년 근속자의 일당은 6,000원에 불과했던 것이다. 생산직 노동자들은 식당도 없이 조선소 현장에서 도시락으로 식사를 하여야 했고, 그 식비마저 1/3은 노동자가 부담하였다. 이런 극한의 환경에서 직업성 난청 환자와 37명의 진폐 환자가 발생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어용적인 노조는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1986년 노동자들의 요구에 턱없이 모자라는 3~5%의 임금 인상안에 회사 측과 합의하였다. 이에 대해 1986년 대의원으로 당선된 2명의 노동자가 ‘도시락 거부, 재교육 반대, 노조 임시 총회 개최’ 등을 요구하는 민주화 투쟁을 전개하였다. 이에 어용 노조와 내통한 회사 측은 2명의 대의원을 포함하여 민주화 투쟁을 전개한 3명의 노동자를 해고시키는 것으로 반격하였다. 하지만 해고된 이들은 어용 노조의 실상을 폭로하고 대한조선공사의 열악한 작업 환경을 고발하면서 조합원들의 의식을 고양시키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경과]
1987년 봄 대한조선공사 노동자들은 어용 노조의 민주화만이 현장 조합원의 생활을 향상시킬 수 있다는 인식으로 노조정상화추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동시에 신문을 발행하여 적극적인 선전 활동을 펼치면서 투쟁을 준비하였다. 1987년 7월 25일 점심시간인 12시 10분경 대한조선공사 식당 벽에 20개 요구 사항이 적힌 벽보가 나붙었다. 놀란 회사 관리자가 이 벽보를 떼어내자, 현장에 있던 노동자들이 벽보 철거에 반발하며 대한조선공사 노동자 투쟁이 시작되었다.
식당 유리창을 박살내고 밖으로 뛰쳐나간 노동자들은 “조공인 동참하라, 임금 인상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시작하였고, 이내 회사 앞의 도로를 점거하였다. 오후 1시경에 이르자 1,500여 명의 노동자들이 차도를 완전히 차단하고 연좌 농성을 시작하였다. 억수같이 내리는 빗속에서도 대오는 흐트러지지 않았고 당시 어용 노조 위원장은 나타나지 않았다.
농성 노동자들은 대표부를 구성하여 일당 1,500원 인상, 연 상여금 400%, 하기 상여금 200% 지급, 부당 해고자 즉각 복직, 진폐 환자의 치료와 보상, 장기 근속자 우대, 어용 노조 해산, 직선제 실시 등 20개 요구 사항을 내걸고 회사 측과 교섭에 들어갔다. 하지만 밤 10시경 교섭은 결렬되었고 농성단은 경찰의 탄압을 피해 회사 내 신관 앞 공터로 자리를 옮겼다.
26일 새벽 4시경에 무장한 전투 경찰이 최루탄을 쏘며 농성장에 난입하여 폭력적으로 농성을 해산시켰다. 이 과정에서 노동자 51명이 연행되고, 농성 대오는 잠시 해산되었다. 하지만 27일 아침 회사 측이 뿌린 선전 유인물이 현장 노동자들에 의해 불태워지고, ‘요구 조건이 관철될 때까지 전원 파업 농성에 돌입한다’는 새로운 유인물이 배포되면서 순식간에 농성 대열은 2,500여 명으로 늘어났다.
농성단은 조선소 내에 모여 경비대, 협상 대표부, 지도부, 운영 위원, 보급대, 특공대 등의 방어 조직을 구성하는 동시에 연좌 농성에 들어가며 회사의 출입구를 봉쇄하고 통제하였다. 이와 함께 농성 대오 속에 섞여 있던 관리자와 어용 노조의 간부를 색출하여 쫓아냈는데, 이 때 회사 상무가 기만적인 발언을 하다가 쫓겨나기도 했다. 이어서 농성단은 26일에 강제 연행된 51명의 동료들을 석방할 것을 요구하였다.
경찰의 반응이 없자 이들은 회사 기물을 파손하고 실력 행사를 선언하며 전경과 백골단을 향해 쇳조각을 투척하며 가두 진출을 시도하였다. 이에 경찰은 오후 5시경 강제 연행된 노동자를 전원 석방하였다. 이로 인해 일시적으로 분위기는 고조되었지만, 27일부터 시작된 협상에서 협상 대표들은 회사 측의 회유와 경찰의 협박에 흔들렸고, 계속된 투쟁에 지친 현장 노동자들 사이에도 균열이 나타났다. 결국 7월 31일 협상 타결을 하게 되었다.
[결과]
협상의 결과 상여금 300%, 휴가비 60% 지급 및 노조의 민주화를 위한 조합원 총회가 보장되었다. 이후 대한조선공사 노동자는 어용 노조를 타도하고 민주 노조를 건설하여 생존권을 확보하는 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의의와 평가]
1987년 대한조선공사 노동자 투쟁은 열악한 노동 조건을 개선하고 생존권을 쟁취하며 민주 노조를 건설하기 위한 투쟁으로 전개되었다. 이러한 노력은 구사대와 경찰의 무자비한 폭력적 탄압을 뚫고 투쟁의 선봉에서 용감하게 싸웠다는 점에서, 부산 지역 노동자들의 투쟁 의지를 북돋우고 전국적인 노동자 투쟁을 견인하는 역할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