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6471 |
---|---|
한자 | 全斗煥訪日反對海雲臺示威 |
영어의미역 | Haeundae Rally for opposing President Chun Doo-hwan’s Visit to Japan |
이칭/별칭 | 전두환 방일 반대 시위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중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오재환 |
[정의]
1984년 부산 해운대에서 벌어진 부산대학교 학생들의 반(反)외세 시위.
[역사적 배경]
전두환 정권은 출범 이후 계속하여 일본과의 관계 개선에 힘을 쏟았다. 1983년 나카소네 샤스히로[中曽根康弘] 일본 총리가 청와대를 방문하여 8·15 해방 이후 처음으로 양국 간의 공식적인 정상 회담을 가졌으며, 그 답방으로 1984년 9월 6일 한국의 국가 원수로는 최초로 전두환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하였다. 이에 대해 전두환의 일본 방문을 사대 외교로 규정하고 반외세 투쟁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 부산에서도 1984년 8월 15일 부산대학교에서 150여 명의 학생들이 모여 8·15 기념식을 가진 뒤 “우리는 반민족적 방일 행각을 절대 반대한다”라는 제목의 유인물을 배포하고, “굴욕 외교 결사반대” “친일 정권 물러가라”는 등의 피켓을 들고 시위를 벌이며 경찰과 대치하였다. 학생들은 신정문과 구정문을 옮겨가며 투석전을 벌이다, 최루탄을 발사하며 교내 15m 안까지 진입한 경찰에 일부 학생이 연행되기도 하였다.
[경과]
1984년 8월 19일 오후 5시경 부산대학교 학생을 중심으로 하는 약 300여 명이 부산 해운대에서 전두환의 방일을 반대하는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들은 준비된 유인물을 배포하고, 1시간 여 동안 가두시위를 벌였다. 이날 시위는 철저한 보안 속에 진행되어 1시간 여 동안 가두 투쟁이 벌어지는 동안에도 경찰이 전혀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였다. 이윽고 연락을 받고 출동한 경찰에 부산대학교 학생들이 다수 연행되었는데, 이 와중에 강미길[철학과 3학년]이 머리를 다치고, 전경진[사회과 2학년]은 바다를 헤엄쳐서 도망쳤다는 등의 일화가 전해지기도 하였다. 이로 인해 10여 명의 학생이 제적당하였다.
이후에도 전두환 방일 반대 시위는 계속되었는데, 전두환의 방일 전날인 9월 5일 부산대학교 금정 회관 앞에서는 60여 명의 학생들이 참석한 가운데 전두환 대통령 방일 규탄 대회가 있었다. 당시 시위대는 “분쇄하자, 매국 방일, 타도하자 매판 재벌”, “매국 방일 분쇄하여 팔려가는 조국 찾자” 등의 구호를 외치며 교내 시위를 벌이다가, 오후 4시 30분경 일장기 화형식을 갖고 자진 해산하였다.
[의의와 평가]
1984년은 기존 학생 운동이 비밀 결사 형태로 활동하던 시기를 넘어, 대중적인 서클이나 학회 등 합법적 조직을 활용하는 방식으로 변화하던 시기였다. 특히 학생 운동이 사회적 이슈를 선점하기 위해 대중적 공간으로 표출되기 시작하면서, 적극적인 가두 투쟁으로 운동의 수위를 점차 높여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시기에 발생한 해운대 시위는 학생 운동이 학내 투쟁을 넘어서 시민을 대상으로 하는 선전 활동을 전개한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