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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6361
한자 尹斗伊
영어음역 Yun Duri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영도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강정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성별
출생 시기/일시 1928년 12월 17일연표보기 - 출생
피해 시기/일시 1943년 9월~1945년 8월 15일 - 부산 영도 제1위안소
몰년 시기/일시 2009년 5월 28일연표보기 - 사망
출생지 윤두리 출생지 - 부산광역시
관련 장소 영도 제1위안소 - 부산광역시 영도구
묘소 망향의 동산 -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성거읍 요방리 산6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 영도 제1위안소에서 있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활동 사항]

윤두리(尹斗伊)는 1928년 12월 17일 부산에서 태어났다. 부산에서 8세까지 지내다가 서울의 이모 집에서 지냈고, 이때 서대문구 천연동에서 학교를 다녔다. 잘살던 집이 망하고 윤두리가 부산으로 돌아온 1941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가족의 생계를 위해 서촌(西村) 피복 공장 등을 다녔다. 1943년 9월경 새로운 공장으로 직장을 옮기려고 알아본 뒤 돌아오는 길에 부산진역 앞 남부경찰서 순사가 좋은 데 취직 시켜 준다며 강제로 일본으로 연행하여 갔다가 다시 부산으로 데려와 부산 영도의 제1위안소에 배치되었다.

윤두리영도 제1위안소에서 함께 배치된 10명의 여성들과 일본군 위안부 생활을 강요당하였다. 윤두리가 있던 제1위안소는 조선인 2층짜리 여관을 빼앗은 것으로 영도 다리를 건너 왼쪽에 있던 히바리마치[雲雀町]라는 유곽 거리 더 안쪽으로 들어가 있었다. 제1위안소의 관리자는 다카야마[高山]라는 일본인이었다.

육·해군이 모두 출입하였고, 성병 예방을 위해 크레졸·삿쿠 등을 이용하였다. 여성들은 부근에 있는 지정 병원에서 정기적으로 검사를 받았다. 군 위안소에서도 기미 가요를 부르고 황국 신민의 서사를 외게 하였다. 윤두리는 위안소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영도 지리를 잘 아는 여성과 함께 도망하다가 곧 잡혀 와서 심한 구타와 총칼로 크게 상처를 입고 수술까지 하였으나 성노예 생활은 그대로 강요당하였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으로 일본군에게서 벗어났으나, 가족들의 생계가 걱정되어 바로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식당에서 일하여 돈을 마련한 뒤 귀가하였다. 윤두리는 이후 위안부 시절이 생각나서 고향인 부산에서 거주하지 않았다. 최종 거주지는 울산이었다. 1992년 피해 신고를 한 이후 위안소 문제 해결을 위한 활동에 참가하였다. 영도의 군 위안소에 대해 윤두리만이 아니라 징병 1기와 지역민의 증언이 있었으나, 일본 연구자 진욱언(秦郁彦)은 부산의 군 위안소를 부인하였다. 문헌 기록은 아직 발굴되지 않았다. 2009년 5월 28일 사망하였다.

[묘소]

묘소는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성거읍 요방리 산6번지에 있는 망향의 동산에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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