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6303 |
---|---|
한자 | 龍山齋 |
영어공식명칭 | Yongsanjae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기장군 정관읍 용수리 352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최두진 |
[정의]
조선 후기 부산광역시 기장군 정관읍 용수리에 있었던 서당.
[설립 목적]
용산재(龍山齋)는 관립 학교였던 향교에 대응하는 사립 학교로서 서원과 비슷한 성격을 가진 학교였다. 숙종 시대 이 지역의 선비들이 성금을 모아 자제들의 교학을 위한 학당을 설립한 것이다. 조룡산이 고을의 중앙에 자리하고 있는 곳에 세워졌기 때문에 용산재라는 이름이 붙여졌고, 학당이라는 이유에서 도재(圖齋)라고 하였다.
[변천]
1733년(영조 9)에 이조 참의[별칭 시랑]였던 권적(權摘)이 기장 현감으로 좌천되어 와서 문장을 세우게 되자 당시 이 지방의 젊은 선비였던 월천(月泉) 신오(辛澳)[ 1714~1786]는 용산재의 강사가 되어 절친하였던 현감의 도움을 받아 크게 진흥하였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서원에 준하는 용산재의 주요 교육 내용은 성리학적이고 도학적인 것이 중심을 이루었을 것이다. 사서오경(四書五經)으로 본원(本原)을 삼고, 『소학(小學)』, 『가례(家禮)』를 문호(門戶)로 삼는다는 것이 상례로 되었다. 사서오경 외에도, 여러 가지 경사자집(經史子集)의 교육도 이루어졌을 것이다.
[현황]
월천 선생이 찬한 용산재의 상량문은 잘 보존되어 있으며 상량가도 현재 남아 있다. 상량문에는 “이곳 영손들의 시, 서, 예, 악, 춘추를 교육하기 위하여 여덟 칸의 큰집을 세웠다”는 요지가 실려 있다. 당시의 용산재는 정면 네 칸, 측면 세 칸과 고실(庫室)[곳간]이 있고, 숙사(宿舍)가 세 칸이었으며, 말 몇 마리가 있었고, 도리 기둥의 기와집으로 서원과 비슷할 정도의 규모였다. 용산재는 구한말에 퇴락되어 현재 건물 등은 전혀 남아 있지 않다.
[의의와 평가]
조선 후기까지도 교육 기관으로서 관의 도움을 받아 활발히 진행되었던 서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