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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남동 혈청소 앞 해상 6·25 전쟁기 민간인 학살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6174
한자 巖南洞血淸所-海上六二五戰爭期民間人虐殺
영어의미역 Site of Civilian Massacre in the Korean War in Front of Amnam-dong Hyeolcheongso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부산광역시 서구 암남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기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사건
관련인물/단체 국민보도연맹원|부산 형무소 재소자
발생|시작 시기/일시 1950년 7~8월연표보기 - 암남동 혈청소 앞 해상에서 민간인 사살
발생|시작 장소 암남동 혈청소 앞 해상 6·25 전쟁기 민간인 학살 장소 - 부산광역시 서구 암남동

[정의]

6·25 전쟁 초 부산광역시 서구 암남동 혈청소 앞 해상에서 국민보도연맹원 등이 집단 살해된 사건.

[역사적 배경]

6·25 전쟁 초 대한민국 정부는 남한 내 좌익 세력이 인민군에 동조할지 모른다는 이유로 국민보도연맹원과 형무소 재소자들을 살해하기 시작하였다. 암남동 혈청소 앞 해상에서도 민간인 상당수가 총살 또는 수장된 것으로 전해진다. 혈청소는 일제 강점기 일본인이 광견병이나 천연두 등의 백신을 만들던 곳으로 당시 일반인의 접근이 엄격히 통제되었다. 따라서 은밀하게 학살이 이루어질 수 있는 장소이었다.

[경과]

부산광역시 서구 암남동 주민 양모[2000년 증언 당시 82세]는 1950년 7~8월 혈청소 앞 해상에서 국민보도연맹원이 총살되었다고 말하였다. 그는 “형무소 재소자들이 총살된 곳은 혈청소에서 배로 20분가량 떨어진 나무 섬이라고 들었다”면서 “바다 한가운데서 벌어진 일이라 현장을 직접 목격한 사람은 없지만 당시 온 동네에 보도연맹원이 총살되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였다”라고 말하였다. 양모는 “송도 해안에서 혈청소까지 가는 길이 손수레 하나도 지나기 힘들 정도로 좁은 오솔길이었기 때문에 충무동 분뇨 저장소 인근에서 사람들을 배에 태워 나무 섬까지 간 것 같다”고 설명하였다.

해방 이후 문학가동맹에 가입하였다는 이유로 부산 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최모[2001년 증언 당시 80세]도 “3년 이상 형을 선고받은 사람들이 심야에 모두 끌려 나갔는데 혈청소 인근 해상에서 수장된 것으로 들었다”라고 증언하였다.

[결과]

혈청소 앞 해상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는지는 파악되지 않는다. 나무 섬이 작은 무인도이기 때문에 시신은 모두 바다에 버려진 것으로 보인다. 피살자 중에는 부산 형무소에서 끌려온 좌익 재소자가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주민 증언에 따르면 총살된 것으로 보이지만 산 채로 수장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의의와 평가]

바다와 접한 지역에서는 학살된 시신의 상당수가 바다에 버려졌다. 여러 명의 손발을 한데 묶은 뒤 그대로 바다에 빠뜨린 경우도 있고, 작은 섬이나 선박 위에서 사살한 뒤 바다에 던진 경우도 있다. 암남동 혈청소 앞 해상 6·25 전쟁기 민간인 학살이 이 같은 학살의 전형적인 경우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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