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616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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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芥川正 |
영어음역 | Akutagawa Tadasi |
이칭/별칭 | 개천정,번연(蕃淵) |
분야 | 문화·교육/언론·출판,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중구 중앙동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이가연 |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에서 부산일보사의 경영과 주필을 맡은 언론인.
[가계]
호는 번연(蕃淵). 아버지는 아쿠타가와 사나이[芥川左內]이며,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부인 아쿠타가와 토요와의 사이에 아들 1명을 두었다. 사후 부산일보사 사장직을 물려받은 아쿠타가와 히로시[芥川浩]는 조카이자 양자이다.
[활동 사항]
아쿠타가와 타다시[芥川正]는 1865년 5월 27일 구마모토 현[熊本縣] 구마모토 시[熊本市] 쓰보이마찌[坪井町]에서 태어났다. 고향 구마모토의 가숙(家塾)과 번교(藩校)에서 유년 교육을 마쳤으며, 17세 무렵 구마모토의 정치 결사 자명회(紫溟會)에 들어가 『자명 신보(紫溟新報)』의 기자로 언론계에 첫발을 내딛었다. 19세에 동경일일신문사에 들어가 기자가 되어, 1884년 12월 갑신정변 때 한성에 특파되기도 하였으나, 2개월 만에 나가사키[長崎]로 송환되었다. 이는 최초 조선과의 인연이었다.
그 후 본국에서 국권당(國權黨), 자유당(自由黨) 등의 정치 결사 활동을 거쳐, 도남대(圖南隊)에 가담하여 타이완으로 건너갔다가, 1894년 청일 전쟁이 발발하자 종군 기자로 다시 조선에 진출하였다.
1905년 전후 대구에서 『대구 신문(大邱新聞)』의 창간에 관여하고 주필로 활동하다가, 1906년 여름 부산에 있던 조선시사신보사(朝鮮時事新報社)에 입사하였다. 그리고 1907년 11월 1일 『조선 시사 신보』의 제호를 『부산 일보(釜山日報)』로 바꾸고 주필 겸 사장에 취임하였다.
‘문장 보국(文章報國)’을 언론인의 사명으로 신봉하던 아쿠타가와 타다시는 일제의 동화 정책을 충실히 따르며 한국 병합과 만몽 일환의 대륙 정책에 적극 협조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세력권인 식민 도시 부산이 지역의 유지인 일본인 상층의 구상대로 발전하기를 바라면서 ‘대부산 건설’ 및 ‘특별 자치제 실시’를 주장하는 등 동화 정책과 모순되는 민족 차별주의와 이기적 지역주의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기도 하였다.
부산일보사의 대주주이자 중역이던 카시이 겐타로[香椎源太郞], 후쿠나가 마사지로[福永政治郞], 오이케 츄스케[大池忠助], 하자마 후사타로[迫間房太郞] 등과 교분이 있었다. 아쿠타가와 타다시의 언론 활동 역시 이들의 입장을 주로 대변하였다. 1928년 1월 6일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