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61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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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安達謙藏 |
영어음역 | Adachi Genjyo |
이칭/별칭 | 안달겸장(安達謙藏),한성(漢城) |
분야 | 문화·교육/언론·출판,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이가연 |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에서 『조선 시보』를 창간한 인물.
[활동 사항]
호는 한성(漢城). 아다치 겐죠[安達謙藏, 1864~1948]는 일본 구마모토 현[熊本縣] 출신의 대륙 낭인으로, 삿사 도모후사[佐佐友房]가 설립한 구마모토세세코[熊本濟濟黌][현 구마모토현립세세코고등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1894년 조선으로 건너와 부산에서 일본어 신문 『조선 시보(朝鮮時報)』를 창간하였다. 원래 『조선 시보』는 1892년 부산의 상황(商況)을 보도할 목적으로, 『부산 상황(釜山商況)』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창간되는데, 이후 『동아 무역 신문(東亞貿易新聞)』으로 개제하였으나 경영 곤란으로 휴간하였다. 이를 1894년 7월 아다치 겐죠가 중심이 되어 당시 부산 총영사 무로타 요시후미[室田美文], 부산상업회의소 회두 사카키바라 시게오[榊原茂夫] 등이 자본금 2만 4000원으로 창립한 것이다. 아다치 겐죠는 창립 당시 사장으로 다카키 스에쿠마[高木末熊]를 선정하였다.
다카키 스에쿠마는 아다치 겐죠와 같은 구마모토세세코 출신으로 당시 『규슈 일보(九州日報)』의 기자로 활동하고 있었다. 아다치 겐죠는 부산에서 『조선 시보』를 창간한 후 곧바로 서울로 올라와 『한성 신보(漢城新報)』를 발행하여 사장 겸 주필로 활동하였다. 1895년에는 재한(在韓) 구마모토 현 출신자를 인솔하여 을미사변을 일으켰으며, 을미사변의 중심인물로 체포되어 히로시마[廣島]의 감옥에 투옥되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곧 석방되었다.
이후 구마모토로 돌아간 아다치 겐죠는 삿사 도모후사와 함께 구마모토 국권당을 만들어 1902년 중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된 후 정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1914년 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 내각의 총선거에서 여당 입헌동지회의 선거장을 맡아서 대승한 이후 도쿠토미 소호[德富蘇峰]로부터 ‘선거의 신[選擧の神樣]’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1925년 가토 다카아키[加藤高明] 내각에서 체신 대신이 되었고, 제1차 와카쓰키[若槻] 내각과 하마구치[濱口] 내각에서 내무 대신도 역임하였다. 1932년에는 국민동맹을 결성하여 총재가 되었으며, 1940년부터는 대정익찬회(大政翼贊會)에 참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