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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6101
영어의미역 Stars
이칭/별칭 스타 다방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
유형 지명/시설
지역 부산광역시 중구 남포동 2가 29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윤인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다방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51년 2월 16일 - 시인 전봉래 스타 다방에서 자살
최초 설립지 스타 - 부산광역시 중구 남포동 2가 29

[정의]

6·25 전쟁 때 문인들의 근거지였던 부산광역시 중구 남포동에 있던 다방.

[개설]

1·4 후퇴를 전후한 피란 시절에 부산 광복동에 있었던 밀다원을 비롯하여 그 주변의 금강, 춘추, 녹원, 청구, 스타, 르네상스, 야자수 다방 등은 문인들의 일종의 아지트로, 전쟁으로 인한 불안과 허무를 달래던 한국 문학사에서 의미 있는 공간이다. 이곳에서 문인들은 시화전을 열고, 원고를 쓰고, 시장기를 때우고, 음악을 들으며 작품을 남겼다. 부산이 전쟁이라는 거센 회오리의 외곽 지대에 있었던 덕분에 많은 문학인들이 모였으며, 가장 치열하고 현실적인 작품이 탄생하는 배경이 되었다.

당시 부산의 숱한 다방들 중에서도 전국문화단체총연합[약칭 문총] 사무실 위층에 자리하고 있었던 광복동의 밀다원이 문인들의 아지트로 가장 유명했고, 그 후 금강, 춘추, 녹원, 스타, 청구 등으로 갈라지고 옮겨갔다. 밀다원에서 쫓겨나다시피 한 이들 중 절반은 남포동스타 다방으로 가고, 나머지 절반은 창선동의 금강 다방으로 갔다. 당대의 산증인인 시인 고은(高銀)은 문총의 중심인물인 김동리(金東里), 조연현(趙演鉉) 등에게 반감을 갖기 시작한 이한직(李漢稷)이 밀다원을 나와 서근배(徐槿培) 등과 스타 다방에 포진하면서 그의 그룹을 만들었다고 하였다.

그 무렵의 그룹 왕초는 찻값만 있으면 가능하였다. 어디선가 자고 나서 다방에 나와서 무턱대고 커피 한잔을 마시고 무일푼으로 앉아 있으면 이한직이 찻값을 물어주었다. 이한직은 인촌의 사위여서 그 후광이 있었다. 피란 시절 다방 외에는 갈 곳이 없었던 이들 문인들의 피폐했던 삶을 극명하게 보여준 사건이 스타 다방에서 일어났는데, 바로 1951년 2월 16일의 전봉래 시인 자살 사건이었다. 불문학을 전공한 유학파로, 시인 전봉건의 친형으로도 잘 알려진 당시 26세의 젊은 시인은 부조리하고 비이성적인 전쟁 상황과 피란에서의 정신적 황폐함을 이기지 못하고 스타 다방 한 구석에서 신경 안정제에 의지하여 삶을 마감하고 말았다. 그의 호주머니에서는 모서리에 ‘그리운 사람에게 보낸다’라고 적힌 다음과 같은 유서가 나왔다.

“나는 페노발비탈을 먹었다. 30초가 되었다. 아무렇지도 않다. 2분 3분이 지났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는 것 같다. 10분이 지났다. 눈시울이 무거워진다. 찬란한 이 세기의 이 세상을 떠나고 싶지는 않았소. 그러나 다만 정확하고 청백하게 살기 위하여 미소로써 죽음을 맞으리라. 바하의 음악이 흐르고 있소.”

[구성]

스타 다방의 위치는 부산광역시 중구 남포동 2가 29번지, 즉 남포동 구둣방 골목에 위치한 건물의 지하였다. 스타 다방의 외관이나 내부를 묘사한 글은 없지만, 밀다원, 금강 등을 묘사하면서 당시의 다방들이 딱딱한 나무 의자에 ‘시골 간이역 대합실’과도 같았다고 하므로, 스타 다방 역시 그 내부 구조나 인테리어가 비슷한 수준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현황]

스타 다방이 있었던 곳은 2011년 현재 부산 꼼장어와 한우 명가라는 음식점이 들어서 있다. 스타 다방이 언제 폐업과 공간의 변화를 겪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부산광역시 중구 광복동·남포동 일대의 다방들은 다수가 서울 수복 후 서울로 옮기거나 사라졌다. 그러나 그 분위기는 자양분으로 남아 1960년대~1970년대 태백 다방, 등대 다방, 백조 다방 등을 거쳐 고전 음악 감상실, 민속 주점 등으로 젊음과 낭만의 문화를 꽃피웠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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