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60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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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西平城- |
영어의미역 | Site of Seopyeongseong Fortress |
이칭/별칭 | 서평포진성,서평포성,서평성지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터 |
지역 | 부산광역시 사하구 감천항로291번길[구평동]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선석열 |
[정의]
부산광역시 사하구 구평동에 있는 조선 시대 때 건립된 서평성의 터.
[개설]
『중종실록(中宗實錄)』에 따르면 서평포진(西平浦鎭)은 그 이전에는 부산진 첨사영 소속의 작은 보성(堡城)이었다고 한다. 1510년(중종 5) 삼포왜란이 일어난 다음해인 1511년(중종 6) 서평성이 축조되었으며, 1522년(중종 17)에는 부산진 첨사영 관하에서 독립하여 다대포진과 함께 동서 양쪽에 부대를 둔 수군만호영을 갖추었다.
[변천]
『대동지지(大東地志)』에 따르면 “동래부의 서남쪽 49리에 있으며, 둘레가 527m, 높이가 4m이고, 1592년(선조 25)에 축조되었다.”라고 하는데, 『중종실록』에는 “삼포왜란에 대한 대응책으로 1511년에 논의되고 축성하였다.”라고 기록된 것을 볼 때 선조(宣祖) 때의 축성은 다시 개축된 것이다. 즉 1592년 4월 일본군이 부산진성을 함락한 이후 두 갈래로 나누어 동래부와 다대포로 향해 진격하였는데, 다대포진성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서평성이 함락되어 무너졌으나 곧 개축되었던 것이다.
1592년 9월 부산포 해전이 있었을 때 서평포 앞바다에서 이순신(李舜臣)의 함대가 왜선 9척을 격파하였다고 하는데, 이때는 아직 서평성은 개축되지 않았고 그 후에 개축이 이루어졌다. 원래 서평성은 서평포 만호[무관 종4품]가 관리하였으나, 임진왜란 이후 다대포 첨사가 서평포진을 관리하다가 1668년(현종 9)에 서평포로 환원되자 성을 개축하였다.
[위치]
서평성 터는 사하구 구평동의 성개[성포(城浦)]에 위치한다고 하였는데, 현재 감천항로에서 감천항로 291번길에 위치한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1979년 한국문화재연구원[현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이 지표 조사가 실시하였다. 서평성 터에서 신라 토기가 출토되어 신라 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보기도 하였으나, 그 당시 성터의 흔적을 찾을 수 없으며 조선 시대의 성터만 확인되었다.
[현황]
현대에 이르기까지 사하구 구평동에 성터가 있었으나, 1966년 이후 산업화로 공장이 들어서면서 거의 대부분 사라졌다. 성의 흔적이 일부 남아 있었으나, 현재 개간으로 인하여 사라졌다.
[의의와 평가]
서평성은 낙동강과 남해안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어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반드시 공략해야 할 대상이었다. 군사적으로 중요한 요충지라는 점에서 임진왜란 등 전쟁에 대한 이해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