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58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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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釜山大學校學院民主化鬪爭 |
영어의미역 | Campus Democratization Movement at Busan National University |
이칭/별칭 | 학내민주화투쟁,학내민주화운동,4월 학내민주화투쟁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부산광역시 금정구 부산대학로63번길 2[장전동 산30]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오재환 |
1987년 부산대학교 학내 민주화를 위해 전개된 일련의 투쟁.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전 국민의 분노를 낳았고, 학원에서도 추모 집회 등을 통해 민주화 운동의 열기가 높아졌다. 이 무렵 부산대학교에서는 1987년 2월 방학 기간 중 『부대신문』의 편집권을 대학원생에 넘겨 학내 언론을 통제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에 2·2 학보사 기자 총사퇴 사건이 벌어졌으며, 개강과 더불어 총학생회는 언론 자유의 침해를 비롯한 학내의 제반 비(非)민주적 요소를 철폐하려는 투쟁을 대중 운동으로 전개하였다.
1987년 3월 6일 부산대학교 학보사 기자들은 대자보를 통해 학내 언론 자유 쟁취 투쟁을 시작하였다. 총학생회는 학생문화부장 이창용을 위원장으로 하는 자유언론쟁취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기자들과 함께 3월 19일 교내 시위, 20일 공개 토론회, 26일 어용 신문 화형식 거행 등을 진행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언론 문제만이 아니라, 학생 회칙의 개정 문제, 사범대 국가 고시의 철폐 대응 문제 등 학내 전반의 비민주적 요소 척결에 대한 의지가 높아졌다. 이에 김종삼 총학생회장 등 6명의 단식 농성을 시작으로 사회대, 사범대, 자연대 학생회장과 사회학과 및 경제학과 학회장 등의 지지 단식이 이어졌고, 단식 학우의 구명과 학내 민주화를 요구하는 1만 2000여 명 부산대학교 학생의 집회가 열리기도 하였다.
학생들은 시험 연기, 수업 거부, 총장실 점거 투쟁 등을 전개하며 학교의 성의 있는 대응을 요구하였고, 1987년 4월 7~9일까지 3일 동안 총장실을 점거하기도 하였다. 이에 학교 측은 합의와 파기를 번복하고, 경찰을 동원하여 학생들을 연행하고 구속하는 것으로 대응하였다.
하지만 부산대학교 학생 1만 4000여 명이 대운동장[후에 ‘넉넉한 터’]에 집결한 4월 17일 집회에 총장과 보직 교수가 참석한 것을 고비로 상황은 급변하였다. 23일 본관에서 양측이 의견을 교환하고, 24일 학생처장과 단과대 학장 명의의 ‘학생 요구 사항에 대한 처리 내용’이 공고되고, 26일 구속 학생 대부분이 석방되었다. 그리고 5월 1일 ‘4월 학내 민주화 투쟁보고 대회’가 열린 가운데 ‘학원민주화추진위원회’를 결성하였다.
6월 민주 항쟁 이후 민주화에 대한 사회의 열망이 높아진 가운데, 부산대학교 내에서는 도서관 개혁이라는 사안이 주요 이슈로 등장하였다. 6월에 도서관학과 학생회는 도서관 개혁의 필요성을 묻는 내용의 엽서를 전체 학회원 앞으로 보내고, 여기에 호응한 학우들을 중심으로 7월, 8월 두 달 동안 개혁 운동을 준비하였다.
부산대학교 도서관의 건물, 시설, 자료, 서비스 시스템 등을 분석하고, 9월 2일 대자보를 통해 개가제 도서관의 신축과 대출 시간 연장 등을 골자로 하는 장·단기 개혁 과제를 요구하였다. 도서관 개혁 문제는 총학생회와 연대 투쟁하게 되면서 1987년 8월 19일 발족한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약칭 전대협]가 추진한 ‘학문·사상의 자유 쟁취’를 위한 학원 민주화 투쟁의 주요 이슈가 되었다.
이에 부산대학교 인권위원회에서는 9월 14일부터 2주일 동안을 ‘학원 민주화 투쟁 실천 기간’으로 선포하고, 학칙 개정과 교수 평의회 구성, 도서관 개혁, 식당 운영 및 기성회 직원의 처우 개선 등 후생 복지 문제를 골자로 한 개혁 과제를 제시하였다. 이를 위해 9월 21일 ‘효원인 결의 대회’와 22일 총장과 학생 간의 토론회가 개최되었다.
1987년 9월 25일 학교 측에서는 도서관 개혁을 비롯한 후생 복지 문제에 대한 대부분의 요구를 수용했으며, 학칙 개정을 약속하였다. 또 문교부는 문교 5원칙의 철회, 교수 평의회의 구성, 총장·학장 선임은 대학 내 추천 위원회에서 2인 이상 추천하여 정부가 임명하는 방안 등을 제시하여 대학 자율화 실천 계획이 확정되었다.
1987년 부산대학교 학원 민주화 투쟁은 1980년대를 통틀어 한 학교, 한 단위 사업장에서 연일 만여 명의 인원이 참가하는 대중 집회가 처음으로 열리면서, 전국적으로 대중 투쟁의 모범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과-단대-총학생회’로 이어지는 총회 투쟁의 전면화로 학생 운동 대중 투쟁의 전형을 창출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러한 학원 민주화 투쟁을 통해 고양된 민주 의식으로 6월 민주 항쟁에서 부산대학교 학생들은 대규모의 지속적인 투쟁을 전개할 수 있었다. 이는 1988년 이후 교학협의회 건설 등 학원 자주화 투쟁으로 계승 발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