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57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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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釜山福泉洞古墳群出土- |
영어의미역 | Jars and Ware Stand Excavated from the Ancient Tomb Sites in Bokcheon-dong in Busan |
이칭/별칭 | 복천동 고분군 출토 호와 기대 일괄(壺와 器臺一括)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물/기명류 |
지역 |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로 66[복천동 50] |
시대 | 고대/삼국 시대 |
집필자 | 홍보식 |
[정의]
부산 복천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삼국 시대의 항아리와 그릇 받침.
[개설]
부산 복천동 고분군은 기원후 1세기부터 7세기까지 무덤이 조영되었고, 2세기 초부터 5세기 후반까지의 무덤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토기들이 출토되었는데, 부산 복천동 고분군 출토 항아리와 그릇 받침[釜山福泉洞古墳群出土항아리와그릇받침]은 가장 주요한 부장품으로서 부산 복천동 고분군의 토기 문화와 변화를 나타내는 토기이다.
복천동 고분군에서 가장 오랜 기간 많은 수량이 출토된 것은 항아리로 2세기 초부터 무덤의 주요한 부장품이 되었고, 3세기 후반에서 4세기 후반까지의 무덤에는 가장 많은 항아리가 부장되었다. 5세기가 되면서 다양한 기형으로 분화하고, 7세기 전반까지 존속하였다.
항아리는 바닥의 형태에 따라 원저(圓底)와 평저(平底)로 구분되는데, 지금까지 출토한 대부분의 항아리는 원저이다. 또 바닥에 다리가 붙지 않은 것과 붙은 것으로 구분되는데, 4세기 말까지는 항아리 바닥에 다리가 붙지 않았으나 5세기 초 이후에는 다리가 붙은 항아리가 나타나고, 5세기 후반이 되면, 항아리의 대부분에 다리가 붙는다. 4세기 후반까지 출토한 대부분의 항아리는 목 길이가 5㎝ 이하로 짧았으나 5세기 이후가 되면 목 길이가 10㎝ 내외인 긴 목 항아리가 증가한다. 전체적으로 볼 때, 4세기 말을 기점으로 그 이전은 와질제(瓦質製)의 목 짧은 원저 항아리가 주류를 이루었으나 5세기 이후부터는 도질제(陶質製)의 원저 목 긴 항아리와 다리가 붙은 목 긴 항아리가 주류를 이루었다.
[변천]
부산 복천동 고분군에는 4세기 초부터 화로 모양 토기의 크기가 커지고, 몸통에 손잡이가 달리면서 안에 항아리가 놓였다. 3세기의 화로 모양 토기 안에는 항아리가 놓이지 않았지만, 4세기부터는 화로 모양 토기가 항아리 받침대로 기능이 바뀐 것이다. 이러한 화로 모양 항아리 받침대는 4세기 말까지 지속되었다. 4세기 후반에는 원통형의 항아리 받침대가 나타나며, 5세기 후반까지 규모가 큰 무덤에 1점씩 부장되는데, 주로 무덤의 주인공의 머리맡에 부장되어 특별한 의미를 지녔다.
4세기 후반의 원통형 항아리 받침대는 높이가 50㎝ 이하로 작지만, 4세기 말이 되면, 높이가 60~70㎝로 커졌다. 원통형 받침대는 항아리를 놓는 수부와 수부를 지탱하는 통부, 지면에 닿는 발부로 나뉘는데, 통부와 발부에는 삼각형 또는 장방형 투창을 배치하고, 삼각문(三角文)·원점문(圓點文)·파상문(波狀文)·즐묘열점문 등 다양한 무늬를 새겨 장식하였다.
4세기 말경에 화로 모양 항아리 받침대가 쇠퇴하는 대신에 발 모양 항아리 받침대가 나타나고, 5세기부터 6세기 초까지 대형 무덤은 물론 중형 무덤에도 부장되었다. 무덤 길이가 6m 이상인 대형 무덤에는 발 모양 항아리 받침대가 수점씩 복수로 매장되었다. 발 모양 항아리 받침대는 항아리를 놓는 반구형의 수부와 나팔 모양으로 뻗는 발부로 구분된다. 외면 전면에 돌대를 돌려 여러 단으로 구분하고, 단 사이에는 파상문·삼각문·즐묘열점문 등 다양한 무늬를 새겨 장식하였다. 또 발부에는 삼각형·직사각형 등의 투창을 뚫었다. 4세기 말에서 5세기 전반의 것은 수부의 형태가 구형을 이루고, 5세기 후반이 되면 수부 형태가 사다리꼴로 변하였다.
[의의와 평가]
바닥이 둥근 항아리와 그것을 받치는 받침대는 4세기 초부터 나타서 5세기 말 또는 6세기 초에 사라졌다. 항아리를 받침대에 놓는 방식이 사라지는 것은 무덤에 대한 인식의 변화 때문으로, 신라·가야 토기의 큰 변화를 나타내는 지표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