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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복천동 고분군 39호 출토 등잔 모양 토기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5780
한자 釜山福泉洞古墳群-號出土燈盞模樣土器
영어의미역 Lamp-design Earthenware Excavated from the Ancient Tomb Site 39 in Bokcheon-dong in Busan
이칭/별칭 복천동 고분군 출토 등잔형 토기(燈盞形土器)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물/기명류
지역 부산광역시 금정구 부산대학로63번길 2[장전2동 산30]
시대 고대/삼국 시대/가야
집필자 서영남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도질 토기
재질 도토
크기 15.8㎝[높이]|11.0㎝[저경]
소유자 국유
관리자 국유|김해박물관|부산대학교 박물관 위탁 관리
출토|발굴 시기/일시 1986년 7월~8월연표보기 - 발굴
현 소장처 부산대학교 박물관 - 부산광역시 금정구 부산대학로 63번길 2[장전2동 산30]지도보기
출토|발견지 부산 복천동 고분군 -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 50지도보기

[정의]

부산 복천동 고분군 39호 부장곽에서 출토된 삼국 시대의 등잔 모양 토기.

[형태]

5세기에 제작된 부산 복천동 고분군 39호 출토 등잔 모양 토기(釜山福泉洞古墳群39號出土燈盞模樣土器)는 아가리가 극히 일부 결실된 완형으로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소성 상태도 아주 좋은 회청색 도질 토기로 전체적으로 녹황색 자연유가 부착되어 있다. 토기는 전체적으로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으며, 심지를 올려 불을 밝힐 수 있도록 만든 등잔 부분과 기름 등 액체 연료가 담기는 똬리 부분과 다리 부분으로 나뉜다.

다리[臺脚]는 1단 장방형 투창이 뚫린 굽다리로 돌대 2조를 돌려 장식하였다. 굽다리 위에는 불을 밝히는 기름 종류를 담을 수 있는 똬리가 얹혀 있는데, 똬리와 굽다리는 일렬 투창으로 장식된 몸통으로 연결된다. 투창과 일렬로 장방형 투창을 뚫은 후, 그 위에 얹혀 있는 형태이다. 등잔은 모두 7개로 구성되어 있으며, 토기의 중간 부분에 1개, 똬리 위에 6개가 부착되어 있다. 중앙의 등잔을 중심으로 6개의 등잔이 감싸고 있는 형태이다. 이들 7개의 등잔은 모두 바닥 가운데 부분에 작은 구멍이 뚫려 있고, 이 구멍은 똬리 부분으로 연결된다.

바닥에 난 구멍을 통해 똬리 속에 심지를 넣어 불을 밝힐 수 있게 만들어진 형태이다. 중앙의 등잔은 소형 완(盌)의 형태로 원통형 다리를 붙여 굽다리 상부에 부착시켰으며, 똬리 위에 부착된 6개의 등잔은 입 부분이 넓고, 바닥 쪽이 좁은 광구소호(廣口小壺) 형태이다. 바닥 한쪽에 뚫은 구멍은 아래 좁은 관으로 토기와 연결된다. 높이는 15.8㎝이고, 바닥 지름은 11.0㎝이다.

[특징]

부산 복천동 고분군 39호 출토 등잔 모양 토기는 신라·가야의 대형 무덤 중에서도 아주 드물게 출토되는 이형 토기로 부산 복천동 고분군 39호·54호 출토품, 경주 금령총 출토품, 함안 도항리 출토품, 김해 능동 출토품 등이 알려져 있다. 김해 능동과 함안 도항의 출토품은 굽다리 위에 항아리가 붙은 형태이며, 경주 금령총 출토품은 2단 투창 고배의 상부에 5개의 접시와 영락(瓔珞)[구슬을 꿰어 만든 장신구]이 장식된 화려한 모양이다. 부산 복천동 고분군 39호 출토 등잔 모양 토기의 굽다리 형태는 함안·김해·경주 출토품과 같으나 등잔을 포함한 상부 형태는 같은 모양이 없다. 그러나 똬리 부분이 따로 만들어진 점, 똬리가 바로 굽다리 위에 얹히지 않고 사이에 고배 신부가 만들어진 점, 특히 등잔이 잔으로 이루어진 점 등은 경주 출토품에 더 가깝다.

[의의와 평가]

부산 복천동 고분군 39호는 5세기 대 덧널무덤으로 신라계와 가야계 유물이 함께 출토되었다. 등잔 모양 토기는 신라와 가야 지역의 대형 무덤에서도 드물게 출토되는 이형 토기로 출토품이 몇 점 알려져 있는데, 부산 복천동 고분군 39호 출토 등잔 모양 토기는 경주 출토품과 많이 닮아 있어 신라계로 분류될 수 있다. 부산 복천동 고분군은 부산의 대표적인 삼국 시대 무덤 유적으로 언제 신라의 영역으로 편입되는지에 대해서는 학자에 따라서는 약 100년 이상 차이가 나기도 하지만 5세기 대가 되면서 신라화가 서서히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이용자 의견
김** 사진자료가 2장이 올려져 있다. 한장은 분명 등잔형토기가 맞지만 또다른 한장은 등잔형토기와 거리가 멀다. 광구소호인데 같이 올려져 있는데 제거됨이 바람직하겠다.
  • 답변
  • 디지털부산역사문화대전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문의주신 내용에 따라 수정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2016.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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