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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춘금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5653
한자 朴春琴
영어음역 Bak Chungeum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김인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정치인
성별
대표경력 대의당 당수
출생 시기/일시 1891년 4월 17일연표보기 -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05년 - 대구 병영에서 급사로 일함
활동 시기/일시 1917년 - 나고야조선인회 회장에 취임
활동 시기/일시 1920년 3월 - 노동상구회 회장에 취임
활동 시기/일시 1921년 12월 - 상애회 도쿄 총본부 부회장에 선임
활동 시기/일시 1922년 5월 - 일선기업주식회사의상무 취체역에 선임
활동 시기/일시 1925년 9월 - 일선구락부 발기인
활동 시기/일시 1931년 7월 - 만선문제유지대회 발기인
활동 시기/일시 1932년 3월 - 제18대 중의원 대의사 당선
활동 시기/일시 1932년 12월 - 조선농업주식회사 주주에 선임
활동 시기/일시 1933년 4월 - 조선농업주식회사 이사에 선임
활동 시기/일시 1934년 3월 - 조선대아세아협회의 상담역에 선임
활동 시기/일시 1935년 11월 - 조선실업구락부 회원
활동 시기/일시 1938년 5월 - 조선실업구락부 평의원
활동 시기/일시 1937년 5월 - 제20대 중의원 선거에서 당선
활동 시기/일시 1938년 1월 - 조선 지원병 제도 제정 축하 회의 발기인, 조선보국회의 발기인에 선임
활동 시기/일시 1939년 12월 - 시국동지회 가입
활동 시기/일시 1940년 1월 - 지원병 훈련소에 500원 헌납
활동 시기/일시 1940년 2월 - 국민협회 고문에 선임
활동 시기/일시 1941년 8월 - 임전대책협의회 발기인에 선임
활동 시기/일시 1941년 9월 - 조선임전보국단 경성지역 발기인에 선임
활동 시기/일시 1941년 10월 - 대화구락부 회장에 취임
활동 시기/일시 1943년 8월 - 국방비 1만 원을 국민총력조선연맹 사무국에 헌납
활동 시기/일시 1943년 11월 - 임시 특별 지원병 익찬회 경성부 동부 위원회 상임위원에 선임
활동 시기/일시 1944년 7월 -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 설립 발기
활동 시기/일시 1944년 10월 - 조선비행기 공업주식회사 취체역에 선임
활동 시기/일시 1945년 2월 - 대화동맹 이사에 선임
활동 시기/일시 1945년 6월 - 대의당 당수에 취임
활동 시기/일시 1945년 7월 24일 - 아시아 민족 분격 대회 개최
활동 시기/일시 1945년 7월 29일 - 국민의용대 조선총사령부 참여직
활동 시기/일시 해방 이후 - 도쿄 민단 중앙본부 고문에 선임
활동 시기/일시 1955년 6월 - 조국통일촉진협의회 조직
활동 시기/일시 1957년 - 일한문화협회 상임고문에 선임
활동 시기/일시 1962년 - 아세아상사 사장에 취임
몰년 시기/일시 1973년 3월 31일연표보기 - 사망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24년 - 부산에서 ‘박춘금 성토 대회’ 개최
거주|이주지 경상남도 양산시
학교|수학지 경상남도 밀양시
활동지 일본 도쿄[東京]
일본 고베[神戶]
활동지 상애회 부산지부 - 부산광역시
묘소 경상남도 밀양시 교동 900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 지역에서 도항 증명서를 강매하여 조선인들의 반발을 샀던 친일 정치인.

[활동 사항]

박춘금(朴春琴)은 1905년 경상북도 대구의 병영(兵營)에서 급사로 있다가 1907년 8월경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東京]와 고베[神戶] 등지에서 토목 노무자, 자전거 직공, 탄광 갱부 등을 전전하며 생활하였다. 이후 폭력배로 성장하여 나고야[名古屋]에서 조선 인삼 판매업에 종사하다가 1917년 나고야조선인회 회장에 취임하였다. 1920년 3월 도쿄에서 이기동 등과 조선인 노동자의 상호 부조 단체인 노동상구회를 조직하여 회장에 취임했고, 1921년 12월 상애회(相愛會)로 개편될 때 도쿄 총본부 부회장이 되었다. 상애회는 이후 경성과 부산, 강경 등에도 지부를 두었는데, 특히 상애회 부산지부는 조선인 노동자들을 상대로 도항 증명서(渡航證明書)를 강매하여 1924년 부산에서 ‘박춘금 성토대회’가 개최되는 등 조선인들의 반발을 샀다.

1922년 5월 이기동이 설립한 일선기업주식회사의 상무 취체역에 선임되었고, 1924년 3월 반일 사상 박멸과 일선 융화를 표방한 각파유지연맹에 노동상애회 대표로 참여하였다. 같은 해 7월 전라남도 하의도에서 소작 쟁의가 발생하자 상애회원을 동원하여 청년회를 습격하였고, 1927년 하마마쓰[浜松] 노동쟁의 파업단 습격, 1928년 재일 한국인 사상 단체인 흑우회(黑友會) 및 흑우연맹 습격 등을 자행하였다.

이상과 같이 박춘금은 각종 협박과 테러를 주도하다가 1932년 3월 제18대 중의원 선거에서 도쿄 제4구에서 입후보하여 대의사에 당선되었고, 그 후로도 수차례 재선되었다. 일제 강점기 조선인으로 중의원 의원을 지낸 것은 박춘금이 처음이었다. 1932년 6월에는 조선에서 중의원 의원 선거법을 실시할 것을 청원하는 국민협회의 건백서를, 1934년 2월에는 지원병 제도 실시를 요구하는 청원서를 중의원에 제출하였다.

1934년 3월에 박춘금은 일제의 대동아 건설 지원을 목적으로 한 조선인대아세아협회 상담역을 맡았으며, 그 뒤 일제의 침략 전쟁 찬양, 학병 권유, 전시 협력 강요 등의 연설을 했고, 국방비 헌납에도 적극적이었다. 1945년 2월에는 야마토동맹[大和同盟]의 이사로 선임되었고, 6월에는 대아시아주의를 표방한 대의당(大義黨)을 조직하고 당수로 취임한 뒤, 7월 24일 경성부 부민관에서 대의당 주최로 아시아 민족 분격 대회를 대대적으로 개최하였다. 이때 행사 도중 조문기, 유만수, 강윤국 세 청년이 시한폭탄을 터뜨려 대회를 무산시키는 부민관 폭파 의거가 발생하였다. 7월 29일에는 국민의용대 조선총사령부 참여에 임명되었다.

해방 후 박춘금은 일본으로 도피하였는데, 1949년 7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약칭 반민특위]에서 맥아더 사령관에게 송환을 요청하였으나 응하지 않았다. 이후 도쿄 재일본대한민국민단[약칭 민단] 중앙본부 고문을 맡았다. 1955년 6월에는 조국통일촉진협의회를 조직했으며, 1957년에는 일한문화협회를 설립하고 상임고문을 맡았다. 1962년에는 아세아상사 사장으로 재직하였다. 1973년 3월 31일 일본 도쿄에서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 『우리의 국가 신일본』[1930]이 있고, 「다년의 주장을 달성한 환희: 다음엔 참정권 획득에 매진」[『매일 신보』 1938. 1. 18], 「전시 의회와 여(余)의 연설」[『삼천리』, 1938. 5], 「조선 참정권 운동과 제국 의회의 반향」[『삼천리』, 1938. 8], 「반도의 경사」[『매일 신보』, 1942. 5. 10], 「승리는 우리 것: 힘차게 싸우자」[『매일 신보』, 1944. 1. 2] 등의 글을 썼다.

[묘소]

박춘금의 사망 후 그의 아버지 묘소 바로 밑[경상남도 밀양시 교동 900번지 천주교 밀양성당 아래 산 중턱]에 무덤을 만들었으나 당시 일반인들 사이에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1992년 일한문화협회에서 박춘금의 무덤 옆에 송덕비를 세우자 밀양 지역 시민 및 문화 단체 관계자들을 중심으로 친일 부역자이자 정치 깡패인 박춘금의 송덕비와 묘를 반드시 철거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고, 이에 2002년 박춘금의 송덕비와 묘가 파묘되어 철거되었다.

[상훈과 추모]

1932년 10월 조선 쇼와 5년 국세 조사 기념장을 받았으며, 1934년 4월 훈4등 서훈을 받았다.

[참고문헌]
  • 반민족문제연구소, 『친일파 99인』2(돌베개, 1993)
  • 민족문제연구소·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친일 인명사전』2(민족문제연구소, 2010)
  • 「박춘금」(『2007년도 조사 보고서』II-친일 반민족 행위 결정 이유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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