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5610 |
---|---|
한자 | 民族日報 |
영어음역 | Minjokilbo |
영어의미역 | National Newspaper |
분야 | 문화·교육/언론·출판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종세 |
[정의]
1961년 부산 등지의 인사들이 참여하여 설립한 진보적 일간지.
[설립 목적]
『민족 일보』는 보수 일변도인 한국 언론계의 상황을 타개하고, 진보적 정치 세력의 인식과 주장을 대변하기 위하여 창간되었다.
[변천]
『민족 일보』는 1961년 2월 13일 재일 한국인인 조용수(趙鏞壽)를 사장으로 창간되었다. 『민족 일보』 창간에는 다수의 혁신계 정치인과 진보적 지식인이 참여했는데, 이 가운데 부산에서는 부산대학교 교수 이종률(李種律)이 참여하였다. 이종률이 『민족 일보』와 인연을 맺은 것은 조봉암(曺奉岩)의 비서 출신인 이영근의 주선에서 비롯되었다. 이영근은 1958년 ‘진보당 사건’이 벌어졌을 때 일본으로 망명하여 화를 피했는데, 이때 이종률의 도움을 받으면서 인연을 맺었다.
4·19 혁명 이후 조용수가 진보적 언론 설립을 구상하자 이영근은 재일 교포의 자금을 지원하는 것과 함께 이종률을 소개했던 것이다. 이에 이종률은 조용수와 함께 창간 작업을 주도했으며, 『민족 일보』라는 제호를 만든 것도 이종률이었다. 창간 이후 『민족 일보』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초반에 2만부에 불과하던 발행 부수는 날이 갈수록 증가하여 많았을 때는 4만 5000부를 기록했으며, 특히 가두판매는 일간지 가운데 단연 최고였다.
그러나 1961년 5·16 쿠데타 이후 계엄사령부에 의해 5월 17일 발행이 정지되고, 19일 폐간 처분을 당하였다. 사장 조용수를 비롯하여 안신규·송지영·이종률 등 간부 13명은 ‘『민족 일보』 사건’으로 재판에 회부되었고, 이 가운데 조용수는 사형당하였다. 1990년 양수정 전 편집국장, 하일민 4월혁명연구소 소장, 송건호 한겨레신문 사장 등 17명에 의해 『민족 일보』 영인판이 발간되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민족 일보』는 “민족의 진로를 가리키는 신문, 부정과 부패를 고발하는 신문, 노동 대중의 권익을 옹호하는 신문, 양단된 조국의 통일을 절규하는 신문”을 창간 취지로 내세우고 창간되었다. 이 과정에는 부산대학교 교수로서 다년간 언론 활동에 종사해 온 이종률이 편집국장 겸 이사로 참여하였다.
창간 이후 『민족 일보』는 일반 언론에서 별로 주목하지 않는 혁신계의 정치 활동, 진보적 지식인의 사회 활동, 노동자·농민·도시 빈민 등 기층 민중의 동태 등을 비중 있게 다루었다. 이로써 기존의 보수 언론과 차별되는 보도 태도를 보여주었다. 특히 ‘민족 일보’라는 신문의 제호가 명시적으로 가리키고 있듯이, 통일 운동과 통일 논의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적극적으로 보도함으로써 민족 분단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노력하였다. 1961년 5월 19일 종간호에 이르기까지 지령 92호를 간행하였다.
[의의와 평가]
『민족 일보』는 4·19 혁명 이후 형성된 정치 환경을 배경으로, 한국 언론사상 최초로 진보적 관점에서 통일 운동을 전개한 언론이었다는 데 의의를 둘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