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55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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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東洋-勞動者鬪爭 |
영어의미역 | Labor’s Strife at Dongyang Rubber Company |
분야 | 역사/근현대,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부암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노재열 |
[정의]
1987년 부산직할시 부산진구의 동양고무에서 전개된 노동자 투쟁.
[역사적 배경]
동양고무는 부산직할시 부산진구 부암동[현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부암동]에 있는 신발 수출업체로서 노동자 수 8,000여 명에 달하는 화승그룹의 계열 회사였다. 1987년 당시 동양고무의 임금과 근로 조건은 화승그룹 내에서도 가장 열악한 편이었으며, 생산직과 사무직의 차이도 극심하였다. 관리직의 연간 보너스가 550%인데 비해 생산직의 보너스는 200%에 불과했고, 생산직의 경우 가족 수당, 위험 수당, 기술 수당, 근속 수당 등은 아예 생각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장기 근속자라 하더라도 생산직일 경우에는 관리직인 신입 사원보다 월급이 낮은 수준이었다. 게다가 노동 조건은 조출(早出)[일찍 출근하는 것]과 연장 근무가 일상화되어 있었고, 연차와 월차 및 생리 휴가는 허락되지 않았으며, 관리자의 폭언과 폭행 속에 현장 분위기는 강제 수용소를 방불케 할 정도로 억압적이었다.
한편으로 동양고무에는 1984년부터 지역의 노동 운동가들이 투입되어 지도와 지원을 계속해왔다. 동양고무는 공장 주변이 주거지 밀집 지역이었고 주변에 야학이나 성당이 있어서 노동자들을 쉽게 만날 수 있는 여건이었기 때문이다. 1986년 동양고무에서는 3월 초부터 6월 말까지 4차례에 걸쳐 임금 인상 투쟁이 전개되었는데, 이는 현장 활동가에 의해 주도된 대중 투쟁이었다. 이는 회사와 경찰의 신속하고 노골적인 탄압으로, 주동자가 체포되면서 실패로 끝났다.
[경과]
이러한 상황에서 1987년 8월 10일 급료를 지급하는 시점에 노동자들의 불만이 부분적으로 터져 나오면서 투쟁이 시작되었다. 동양고무 노동자의 불만은 8월 13일까지는 점심시간이나 부서 단위로 집회를 시도하는 것으로 나타났으나, 회사 측에서 사전에 이를 감지하고 주동자를 회유하거나 제지하면서 일시적인 긴장 상태가 유지되었다.
8월 19일 오전 10시에 운동장으로 몰려나온 노동자들을 회사 측에서 강제로 퇴근시켰으나, 300여 명의 노동자들이 집결하면서 농성 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의 요구 사항은 보너스 560% 지급, 임금 20% 인상, 가족 수당과 장기근속 수당 지급, 어용 노조의 퇴진 등이었다. 기존의 노조 집행부를 믿지 못한 농성 노동자들은 스스로 독자적인 협상 대표를 뽑아 회사 측과 협상을 시작하였다.
이튿날인 8월 20일 1,000여 명으로 불어난 농성 대오는 12명의 협상 대표를 선출하였다. 하지만 협상 대표 사이의 견해 차이로 강력한 투쟁 대오를 유지하기 어려웠다. 21일 협상 대표 내부의 의견 차이가 불식되지 않은 채 일부 대표의 의견을 반영한 협상안이 타결되기에 이르렀다. 이에 노동자들은 농성을 해산하였다.
[결과]
농성단의 대표가 회사 측과 합의한 내용은 상여금 350% 지급, 연월차 휴가의 실시 등이었다. 이러한 내용은 애초 농성단이 요구한 것과는 차이가 있었다. 이후 투쟁의 중심에 섰던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동양고무산업(주) 노동자생존권투쟁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이들은 1987년 12월 1일 동양고무노동조합 민주화추진위원회의 명의로 『동양 노동자 신문』을 창간하면서 투쟁을 지속하였다.
[의의와 평가]
1987년 동양고무 노동자 투쟁은 여느 사업장의 경우와 달리, 부산 지역의 현장 활동가들의 계획 아래 조직적으로 진행된 투쟁이었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또한 투쟁의 과정에서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어용 노조의 실체가 드러나면서, 어용 노조의 민주화 투쟁에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