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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목재 노동자 투쟁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5500
한자 東明木材勞動者鬪爭
영어의미역 Labor’s Strife at Dongmyeong Lumber Co.
분야 역사/근현대,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부산광역시 남구 용호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노재열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노동 운동
관련인물/단체 동명목재
발생|시작 시기/일시 1980년 5월 8일연표보기 - 시작
종결 시기/일시 1980년 5월 17일연표보기 - 종결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80년 5월 10일 - 공장 앞 도로 점거 투쟁
발생|시작 장소 동명목재 - 부산광역시 남구 용당동
종결 장소 동명목재 - 부산광역시 남구 용당동

[정의]

1980년 부산직할시 남구의 동명목재에서 전개된 노동자 투쟁.

[역사적 배경]

동명목재부산직할시 남구 용당동[현 부산광역시 남구 용당동]에 있는 노동자 수 3,000여 명의 목재 가공업체이다. 1979년부터 원목의 수입 가격이 오르면서 목재 가공업의 채산성이 악화되었다. 더욱이 1980년부터 매월 6억 원에 달하는 적자가 발생하면서 동명목재는 전면 휴업에 들어갔다.

하지만 동명목재의 조업과 휴업이라는 것은 미담보 재산이 170억 원인 강석진 회장에게는 단지 경제적 손익을 의미하는 것이었지만, 이와 달리 노동자들에게는 생존이 달린 일이었다. ‘배고파 못살겠다, 밥이 아니면 원목이라도 달라’는 구호를 내세운 노동자들에게 회사의 정상화는 생계가 달린 절실한 문제였던 것이다.

이 때문에 1980년 3월 31일 시작된 조업 단축이 5월 7일 15일 간의 전면 휴업으로 이어지자 동명목재 노동자들은 휴업에 항의하며 투쟁에 나섰다. 회사 운동장에 모인 3,000여 명의 노동자들은 ‘동명목재정상화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정부는 기업 가동을 보장하라”, “금융 기관은 기업을 살리는 데 최선을 다하라” 등 7개 항의 요구 조건을 내걸고 농성에 들어갔다.

[경과]

1980년 5월 8일 회사 측의 전면 조업 중단 방침에도 아랑곳없이 3,000여 명의 노동자들은 정상 출근하여 휴업 철폐를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이날 노동자들은 3단계 투쟁 방안을 마련하고 회장의 재산 공개를 요구하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은행 및 정부 당국에 대책을 요청하기로 하였다. 이러한 투쟁에 200여 명의 노동자 가족들과 기숙사의 520여 명 여성 노동자도 적극 참여하였다.

5월 10일 4일째 농성 투쟁을 벌여온 노동자들은 이날 지급되어야 할 자신들의 임금이 은행의 융자 거부로 지급되지 못하자, 분노하며 공장 앞 거리를 점거하고 경찰과 대치하였다. 5월 12일 ‘동명목재정상화추진위원회’는 회장의 소유 재산을 처분하여 회사 운영 자금으로 사용하고 새 경영진에게 회사 운영을 맡긴다는 회사 재건 계획을 발표하며 관계 당국의 성의 있는 지원을 촉구하였다. 그 후 5월 17일까지 관계 당국의 대책을 요구하며 3,000여 명의 노동자들은 끈질기게 농성 투쟁을 계속하였다. 하지만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5월 17일 전두환(全斗煥) 신군부의 전국적인 비상계엄 조치로 농성을 끝낼 수밖에 없었다.

[결과]

행정부의 지원을 통한 동명목재의 재건을 주장한 부산 시민과 ‘부산시 지역대책협의회’와 ‘동명목재정상화추진위원회’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과도 정부의 무관심과 방관으로 동명목재는 결국 폐업되고 말았다.

[의의와 평가]

동명목재 노동자의 투쟁은 부산 지역 노동자들의 고용 불안과 그로인해 고통 받는 노동 현실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특히 한국 경제의 대외 의존적 성격이 가지는 문제는 개별 기업 차원에서 극복하기는 힘들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며, 이에 대한 투쟁도 개별 기업 차원이나 정부에 대한 청원 투쟁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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