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54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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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東國製鋼勞動者鬪爭 |
영어의미역 | Labor’s Strife in Dongguk Steel Mill Co., Ltd. |
분야 | 역사/근현대,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부산광역시 남구 용호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노재열 |
[정의]
1980년 부산직할시 남구 용호동의 동국제강에서 일어난 노동자 투쟁.
[역사적 배경]
동국제강은 부산직할시 남구 용호동[현 부산광역시 남구 용호동]에 있는 노동자 수 2,800여 명의 철강 제조업체이다. 1980년 당시 동국제강 노동자들은 8시간 3교대제와 12시간 2교대제로 일하면서, 1년 중 구정과 추석을 제외하고는 공휴일도 없이 근무해야 했다. 그러면서도 2년 근속자의 월급이 8만 4000원에 불과했는데, 이는 다른 업체에 비해 거의 1/2 수준이었다.
게다가 하루 결근하면 8,000원을 공제하고, 일요일 하루를 결근하면 4,000원을 공제하며, 2~3분만 지각해도 1시간에 해당하는 노임을 공제하는 방식으로 노동자들을 혹사시키고 있었다. 작업 환경도 열악하여 빨갛게 달군 쇠를 다루는 공장 안은 38~40도의 찜통이었다. 이런 탓에 신입 사원 90% 이상이 1~2일 만에 그만두는 상황이었고, 공장 종업원의 대부분은 40대 이상의 중년 노동자였다.
이러한 참담한 현실 속에서 1977년 동국제강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결성하려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듬해인 1978년 12월에 15.6%의 임금이 인상되었고, 1979년에는 임금 인상이 없다가 1980년 4월에 부산직할시[현 부산광역시]의 직권으로 15.4%의 임금이 인상되었다. 하지만 연평균 25%에 달하는 당시의 물가 인상률에 비하면, 이 정도의 임금 인상률은 턱없이 낮은 것이었다.
[경과]
1980년 4월 28일 밤 10시경 300여 명의 노동자들이 야간작업을 중단하고 농성 투쟁에 돌입하면서 동국제강 노동자 투쟁이 시작되었다. 이 소식이 알려지면서 농성 대열은 1,000여 명으로 늘어났고, 농성단은 임금 40% 인상, 상여금 400% 지급, 공상자 임금의 60%에서 100%로의 인상 등을 요구하며 파업에 돌입하였다.
4월 29일 이들은 회사 사무실과 계근실[인사 기록 카드와 경리 장부를 보관 장소]을 부수고 불을 지른 후, 밤 8시 45분경 거리로 나섰다. 하지만 회사 정문 앞에는 기동 경찰 850명과 7대의 소방차가 대기하고 있다가, 거리로 나선 노동자들을 향해 최루탄을 쏘며 저지하였다. 이에 노동자들은 돌멩이, 쇠파이프, 각목으로 대항하며 경찰과 맞서 싸웠지만 끝내 물리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밤 11시 50분경 농성을 풀었다. 이때 주동자 8명이 연행되어, 6명은 구속되고 2명은 불구속으로 입건되었다.
하지만 4월 30일 오전 1,000여 명의 노동자들은 다시 회사로 집결하여, 회사 및 경찰과의 교섭을 위해 각 부서별로 100여 명의 대표를 선출하여 협의 기구를 구성하였다. 이들은 요구 사항으로 1979년 임금 인상분 20%를 포함하여 56.5%의 임금을 인상할 것, 근로 조건을 개선할 것, 퇴직금 누진제를 실시할 것, 노조 결성을 지원할 것, 현장 노동자와 사원 간의 차별 대우를 철폐할 것 등 8개항을 제시하고 농성 투쟁을 전개하였다.
[결과]
교섭 대표 내부의 분열 속에서 1980년 5월 5일 회사가 제시한 임금 30% 인상안에 합의하며 투쟁은 마무리되었다. 동국제강에서는 1987년 8월 19일 노동조합이 설립되었다.
[의의와 평가]
동국제강 노동자 투쟁은 1980년대 초 너무나 열악한 노동 조건에 항의하며 터져 나온 자연 발생적인 투쟁이었다. 그럼에도 이들의 투쟁은 같은 시기 부산 지역의 노동 운동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