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53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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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內院精舍觀音菩薩圖-遺物一括 |
영어의미역 | Accompanying Relics of Avalokitesvara Painting, Naewonjungsa |
이칭/별칭 | 내원정사 관음보살도,관음도 복장 |
분야 | 종교/불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물/유물(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서구 엄광산로40번길 121-22[서대신동 3가 산3-2]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미경 |
[정의]
부산광역시 서구 서대신동 3가 내원정사에 있는 조선 후기의 관음보살도와 복장 유물.
[개설]
대승 불교에서 관음보살(觀音菩薩)은 대자대비(大慈大悲)의 보살로서 현실에서 고통 받는 모든 중생들을 구제하고 궁극적으로는 아미타 부처의 극락정토(極樂淨土)로 인도해 모든 사람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보살로 널리 믿음을 받았다.
우리나라는 일찍부터 관음보살을 소재로 한 불화가 많이 제작되어 왔으며, 특히 고려 후기 성행한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의 전통이 조선 시대까지 계승되었다. 고려 후기의 「수월관음도」는 선재동자(善財童子)가 구도(求道)의 길을 찾아 유행(遊行)하다가 관음보살을 만나는 장면을 형상화한 것으로 『화엄경(華嚴經)』의 입법계품(入法界品)을 바탕으로 그려졌다.
조선 시대에 접어들며 관음보살도는 『법화경(法華經)』의 관세음보살 보문품(觀世音菩薩普門品)의 강력한 구제 신앙에 힘입어 현실의 모든 고통에서 중생들을 구제하는 보살로서 더욱 친근하게 여겨져 왔으며, 조선 말기에는 머리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백의(白衣)를 걸친 수월관음보살의 모습으로 더 많이 그려졌다.
조선 후기에는 관음보살도를 관음전(觀音殿) 혹은 원통전(圓通殿)의 후불탱화로 봉안하였으며, 대체로 「수월관음도」의 형식으로 그렸다. 관음전에는 관음보살상을 단독으로 모신 후 뒤쪽 벽에 관음보살도를 걸어 봉안하였는데, 조선 말기에는 관음전 외에도 조사당(祖師堂) 등에 관음보살도를 봉안하는 사례도 보인다.
[형태]
내원정사(內院精舍)의 관음보살도는 조선 말기인 1873년(고종 10)에 조성된 액자 형태의 탱화로 뒷면에서 복장 유물이 발견되었다. 세로 75.8㎝, 가로 45.4㎝의 소규모 불화로 화면 하단의 중앙에 화기(畵記)가 남아 있다. 관음보살은 버드나무가 꽂힌 정병(淨甁)과 향로, 새가 날아드는 바다 위 높은 암반 위에 앉아 있다. 배경에는 대나무가 군집을 이루고 있다. 관음보살은 화불(化佛)이 묘사된 보관을 머리에 쓰고 한 손에는 수정 염주를 잡은 채 아래를 굽어보며 선재동자를 맞이하고 있다. 파도가 넘실대는 물결 위의 선재동자는 복숭아나무 가지와 영지(靈芝)[불로장생을 의미함]를 담은 그릇을 관음보살을 향해 높이 받들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한편 종교화로서 예배 대상인 불화에는 생명력을 부여하는 복장 유물(腹藏遺物)을 안치하는데, 액자형의 경우 대체로 뒷면 중앙부에 복장물을 납입한다. 내원정사의 관음보살도에는 쪽물을 들인 비단에 붉은 글씨로 쓴 원문(願文)과 함께 종이로 만든 후령통(喉鈴筒) 및 팔엽대홍련지도(八葉大紅蓮之圖), 오륜종자도(五輪種子圖), 준제구자도(准提九字圖), 열금강지방지도(列金剛地方之圖), 보협다라니 등이 발견되었다.
[특징]
일반적으로 조선 후기 관음보살도는 낮은 암반 위에 정면을 향한 자세로 앉아 있고 선재동자와 해상용왕(海上龍王)이 좌우에 배치되며 배경을 꽉 차게 표현하게 된다. 이처럼 조선 시대 전반에 걸쳐 관세음보살상은 정면을 응시하는 모습으로 제작되는 것이 일반적인데 비해, 내원정사의 관음보살도는 측면향이다. 또 관음보살이 앉은 높은 암반은 『화엄경』에 근거한 보타락가산(普陀洛迦山)으로 관음보살이 있는 곳을 암시한다. 왼팔을 암석에 의지한 자세와 일반 여인상을 표현한 것 같은 얼굴 묘사, 장수(長壽)를 상징하는 복숭아나무와 영지를 두 손에 받쳐 든 동자의 표현 등은 앞 시대에는 볼 수 없는 조선 말기 관음보살도의 새로운 특징으로 지적되는 점이다.
내원정사의 관음보살도는 불화 하단에 “채화 시주 정미생 원선 보체 수산 고흘 복해 왕양 동치 십이년 원월 일(彩畵施主丁未生元善保體壽山高屹福海汪洋同治十二年元月日)”이라고 적은 화기를 남기고 있어, 제작 시기가 동치 12년(同治十二年), 즉 1873년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제작자는 ‘채화 대시주(彩畵大施主)’로 복장 원문에도 적어 놓은 비구(比丘) 원선(元善)으로 추정된다. 원선은 19세기 중반경 범어사(梵魚寺)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한 화승(畵僧)으로 많은 작품을 남기진 않았지만, 「통도사 안적암 아미타 후불홍도」[1868]와 「범어사 사천왕도(梵魚寺四天王圖)」[1869] 제작에 참여하였고, 그 뒤 부산 「정수사 아미타 후불홍도」[1872]를 제작하며 독자적인 활동을 펼쳤던 것으로 보아 2년 뒤 내원정사의 관음보살도를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의의와 평가]
불화의 화기와 복장에 넣었던 원문이 남아 있어 제작 연대와 제작자를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조선 후기 관음보살도의 흐름을 추정할 수 있는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