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53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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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南孝溫 |
영어음역 | Nam Hyeon |
이칭/별칭 | 백공(伯恭),최락당(最樂堂),추강(秋江),행우(杏雨),벽사(碧沙),문정(文貞)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영나 |
[정의]
조선 전기 부산 해운대를 돌아보고 「유해운대서(遊海雲臺序)」를 쓴 유생이자 문인.
[가계]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백공(伯恭), 호는 최락당(最樂堂), 추강(秋江), 행우(杏雨), 벽사(碧沙). 태종(太宗) 때 영의정을 지낸 남재(南在)의 5세손으로 증조 할아버지는 예문관 직제학 남간(南簡)이고, 할아버지는 사헌부 감찰 남준(南俊)이며 아버지는 생원 남전(南恮)으로 32세에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는 고성 이씨(固城李氏)이다. 부인은 파평 윤씨(坡平尹氏)로 군수 윤훈(尹壎)의 딸이다. 아들은 남충세(南忠世)로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 때 죽임을 당했다.
[활동 사항]
남효온(南孝溫)[1454~1492]은 18세 때인 1478년(성종 9) 소릉(昭陵) 복위 상소를 올려 정치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하였고, 생활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소릉은 단종(端宗)의 어머니 현덕 왕후(顯德王后)의 묘로, 1457년(세조 3) 때 폐위되어 파헤쳐졌다가 1513년(중종 8) 복위되었다. 남효온은 1480년(성종 11) 생원시에 급제하였으나 더 이상 과거 공부를 하지 않았다.
남효온은 1482년(성종 13) 죽림칠현(竹林七賢)의 결성을 주도하였다. 죽림칠현은 중국 진나라 초기에 일곱 사람이 노자(老子)나 장자(莊子)의 허무 사상을 숭상하여 죽림에서 놀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세상의 부귀영화를 등지고 자연과 벗하면서 평생 유유자적하였다. 남효온의 죽림칠현 역시 이런 생활 방식을 따라하여 동대문 성 밖 죽림에 모여서 소요건(逍遙巾)을 쓰고 술을 마시고, 춤추고 노래하며 시간을 보냈다. 구성원은 대다수가 성리학자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생이었으나 종실(宗室)[임금의 친족]과 명문가 자손들도 있었다.
남효온은 전국을 유람하면서 많은 글을 지었다. 32세 때 금강산 및 관동 지방을 여행하면서 「유금강산록(遊金剛山錄)」을 지었고, 개성과 관동 지방을 여행하면서 「송경록(松京錄)」을 지었다. 33세 때는 연말, 연초에 걸쳐 공주 지방을 여행하면서 「공주 국선암(公州國仙庵)」과 「공주 유별 진백원(公州留別陳百源)」을 지었고, 지리산을 여행하고서 「지리산 일과(智異山日課)」와 「유천왕봉기(遊天王峯記)」를 지었다. 해운대를 유람하면서 「유해운대서(遊海雲臺序)」를 지었는데, 이 글을 통해 당시 사대부 문인들의 해운대 유람 행차 모습을 대략 알 수 있다. 홍다림(紅茶林), 원왕대(鴛鴦臺), 오리도(吾里島), 해운포(海雲浦), 대마도(對馬島), 기장 등 해운대 주변의 여러 지명도 확인할 수 있다. 36세 때는 관서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유가수굴기(遊佳殊窟記)」를 지었고, 38세 때는 호남 지방을 여행하면서 「담양향교 보상기(潭陽鄕校寶上記)」를, 여산에서는 「감정기(鑑亭記)」를, 장흥 별관에서는 「조대기(釣臺記)」를 지었다. 이렇게 전국을 유람하다가 1492년(성종 23) 서른아홉에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저술]
남효온은 26세 때 호남에서 김종직을 만나 스승으로 섬기게 되었다. 김종직은 남효온의 강직한 성품과 재주를 아껴 항상 ‘우리 추강’이라고 하였고, 이런 태도는 죽을 때까지 변함이 없었다. 한편 생육신의 한 사람인 김시습(金時習)과도 친분이 있었다. 김시습이 20년 연상이었으나 두 사람은 연령을 뛰어넘어 서로에게 스승이자 제자이고 친구였다. 남효온은 김종직과 남효온을 통해 불의에 항거하는 자세를 배웠다.
저술로는 사육신(死六臣)에 대해 쓴 『육신전(六臣傳)』, 성종(成宗)과 연산군(燕山君) 문인들과의 일화 및 연산군의 학정을 소재로 한 『추강 냉화(秋江冷話)』, 친분이 있는 사우 50여 명에 대한 언행과 문장 등을 기록한 『사우 명행록(師友名行錄)』 등이 있다. 문집으로 『추강집(秋江集)』이 있다. 문집의 초간본은 1577년(선조 10) 외증손 유홍(兪泓)이 5권 4책으로 간행하였고, 중간본은 1677년(숙종 3) 유홍의 증손자 유방(兪枋)이 5권 5책으로 간행하였다. 1922년 후손 남상규(南相圭)가 재간행하여 오늘날까지 전한다.
[묘소]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김종직의 문인이었고, 소릉 복위 상소를 하였다는 이유로 부관참시(剖棺斬屍)[죽은 뒤에 큰 죄가 드러난 사람을 극형에 처함]되었다. 남효온의 무덤이 수렵 금지 구역에 있어서 양화도(楊花渡) 강변으로 옮겨 형을 집행하고 시신을 모래 위에 두고 갔는데, 가족들이 수습하지 않아 소재지를 알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현재 경기도 김포시 하성면 후평리 산 4번지에 있는 남효온의 묘는 후에 시신을 되찾아서 묻은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상훈과 추모]
1513년(중종 8) 소릉이 복위되면서 좌승지에 추증되었고, 고양의 문봉서원(文峰書院), 장흥의 예양서원(汭陽書院), 함안의 서산서원(西山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1782년(정조 6)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고, 문정(文貞) 시호를 받았다. 이후 영월의 창절사(彰節祠)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