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52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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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相休 |
영어음역 | Gim Sanghyu |
이칭/별칭 | 계용(季容),초천(蕉泉),문간(文簡)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부산광역시 강서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상기 |
[정의]
조선 후기 경상 관찰사로 부임하여 명지 염전의 운영을 원활히 하였던 문신.
[가계]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계용(季容), 호는 초천(蕉泉). 증조 할아버지는 김만근(金萬謹)이고, 할아버지는 김진륜(金鎭崙)이며, 아버지는 김무택(金茂澤)이다. 어머니는 해평 윤씨(海平尹氏)로 윤득영(尹得永)의 딸이다. 부인은 송재위(宋載緯)의 딸이다.
[활동 사항]
김상휴(金相休)[1757~1827]는 1757년(영조 33)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났다. 늦게까지 과거 공부를 하여 45세 때인 1803년(순조 3) 증광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홍문록[홍문관 관리 대기자 목록]에 오르고, 이듬해 홍문관 교리로서 강화부 안핵어사(江華府按覈御史)로 파견되어 강화부 중군(江華府中軍) 이만원(李晩遠)의 불법 행위를 다스렸다. 1805년(순조 5)에는 시독관으로 『자치통감 강목(資治通鑑綱目)』을 강독하면서 임금에게 선악을 밝게 할 것을 아뢰었다. 이듬해 홍문관 수찬, 1807년(순조 7) 응교를 거쳐 공충우도(公忠右道)[현재 충청도의 일부]의 암행어사로 나가 해당 지역의 목사·군수 등이 백성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다는 내용의 장계(狀啓)를 올렸다.
1810년(순조 10)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왔으며, 그 공으로 1812년(순조 12) 가의대부(嘉義大夫)의 품계를 받았다. 1817년(순조 17) 강화부 유수, 1819년 성균관 대사성, 이조 참판, 대사간을 지냈다. 1822년(순조 22) 경상 관찰사로 나가서는 부산광역시 강서구 명지동에 있었던 염전의 운영 질서를 바로 세웠다. 염전민들의 과도한 노동을 금하고, 관청의 배가 함부로 염전에 드나드는 것을 막아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켰다. 1824년(순조 24) 형조 판서, 좌부빈객, 의정부 좌참찬, 1825년 판의금부사, 한성 부윤, 1826년 예문관 제학, 이조 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성품이 강직했던 김상휴는 23년간 관직에 있으면서 불법 행위를 벌하고, 백성에게 선정을 베푸는 등 모범적인 관리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71세에 세상을 떠났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부산광역시 강서구 명지동 명지파출소 앞에 명지 염전의 백성들이 세운 김상휴 영세불망비(金相休永世不忘碑)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