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51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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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國際商社勞動者鬪爭 |
영어의미역 | Struggle of Labor at Gukje Co., Ltd. |
분야 | 역사/근현대,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부산광역시 사상구 괘법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노재열 |
[정의]
1987년 부산직할시 사상구 괘법동의 국제상사에서 일어난 노동자 투쟁.
[역사적 배경]
국제상사는 부산직할시 사상구 괘법동[현 부산광역시 사상구 괘법동]에 있던 프로스펙스 신발을 제조하는 화학 업종의 회사였다. 많을 때는 노동자 수가 2만 5000여 명에 이를 정도의 세계 최대의 신발 수출 업체였지만 노동 조건은 매우 열악하였다. 생리 휴가와 연월차 휴가가 없을 뿐더러, 30분 이상 강제 조출(早出)[일찍 출근하는 일]을 해야 했다. 작업장에는 환풍 장치가 없어 본드 냄새가 심했으며, 여름에는 작업장 온도가 40~50도를 넘을 정도였다. 식사는 노동자들이 ‘개밥’이라고 부를 만큼 형편없었고, 화장실은 노동자 500명 당 1개에 불과하였다.
사무직과 생산직 노동자의 차별도 심하여 생산직 노동자의 보너스가 3년 이상 근무자에 한하여 200%인 것에 비해, 사무직 노동자의 경우는 400%였다. 게다가 노무 관리자의 욕설과 구타는 일상화되어 있었다. 당시 국제상사에는 야간 학교를 다니는 어린 학생들이 있었는데, 어린 여학생조차 이들의 손찌검과 군화 발길질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노조가 있기는 했으나 어용 노조였기 때문에, 노조비만 내고 1년에 한 번 100원짜리 비누를 받는 것이 전부였다. 위원장 선거라는 것은 총회나 공고 절차도 없이 어느 날 갑자기 종이를 나누어 주고는 아무런 말이나 설명도 없이 1번을 쓰라고 해서 당선되는 식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터져 나온 1987년 6월 민주 항쟁에 국제상사 노동자들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6월 18일 시위에는 부산의 최대 공업 단지가 있는 사상과 주례 인근의 노동자들도 대거 참여하였다. 이에 사상 터미널과 주례를 잇는 가두시위에는 2만여 명의 노동자, 학생, 지역 주민이 참여하여 부산의 6월 민주 항쟁 가운데 최대의 시위를 벌였던 것이다. 가두시위의 경험은 이어지는 7월·8월·9월 노동자 대투쟁을 크게 고무하였다.
[경과]
1987년 7월 28일 낮 12시경 국제상사 공장 내에 은밀히 유인물이 돌았다. 유인물의 내용은 8월 1일부터 4일 동안 휴가가 주어진다는 것, 휴가비로 2일분 일당에 해당하는 5,000~6,000원 정도밖에 지급되지 않는다는 것, 휴가비로 100%는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윽고 점심시간이 시작되자 공무부[금형과]의 40여 명 남성 노동자들이 회사 내 운동장을 돌며 시위를 시작했고, 오후 3시경에는 3,000여 명의 노동자들이 참가하여 연좌 농성에 돌입하며 투쟁이 시작되었다. 농성에 들어가면서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대표를 따로 뽑아 회사 측과 협상에 들어갔다. 그동안 국제상사에 노동조합이 있긴 했지만 노조 위원장은 1년 내내 현장에 얼굴을 내민 적도 없었다. 이 때문에 농성 노동자들은 노조 위원장이 그들의 대표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농성 노동자의 요구 사항은 16개 항으로, 보너스 연 400% 지급, 휴가비는 기본급의 100% 지급, 휴가와 학생의 수학여행 및 국경일을 유급일로 할 것, 학생 시급을 일반인과 동일하게 할 것, 생산직 노동자에게 가족 수당을 지급할 것, 주야간 교대자의 시급을 동일하게 할 것, 생리 휴가와 월차 휴가를 실시할 것, 식당 밥을 개선할 것, 작업 시간을 지킬 것, 작업장 내 선풍기와 환풍기를 즉각 증설할 것, 잔업과 연근 수당을 정확하게 계산하여 지급할 것, 어용 노조는 각성할 것, 노조 위원장을 직접 선출할 것 등이었다. 이러한 요구는 국제상사 노동자의 열악한 생존권을 개선하기 위한 최소한의 요구였다. 하지만 회사 측은 공장장이 나서서 회장과 사장이 해외 출장 중이라며 농성을 해산할 것을 종용하였다.
농성 노동자 1,500여 명은 회사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기숙사 건물에서 철야 농성을 하며 첫날을 보내었다. 7월 29일 농성 2일째부터 경찰이 나섰고, 3일째에는 구사대(救社隊)가 동원되었다. 이들은 망치, 쇠파이프, 각목 등으로 농성 노동자들을 두드려 패고 돌멩이와 유리병 등을 마구 던지며 소방 호스로 물을 뿌리는 등 폭력적인 강제 진압에 나섰다.
농성 노동자들은 돌과 화염병을 던지며 구사대에 맞서 농성장을 지켜냈지만, 이 와중에 노동자 48명이 부상을 입었고 그 중 3명은 치명상을 입는 상황이 벌어졌다. 또한 구사대와 투석전을 벌이며 밀리던 90여 명의 여성 노동자들은 지하 강당에 감금되었다. 농성 4일째인 7월 31일 농성단은 거의 굶다시피 진행해 온 농성 투쟁에 한계를 느끼고, 기숙사를 나와 사상성당으로 농성 장소를 옮겼다. 이후 8월 13일까지 16일째 농성을 진행했으나 회사 측은 협상조차 하지 않았다. 이런 회사 측의 태도에 노동자들은 분노하였지만, 오랜 농성에 지쳐 농성을 자진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결과]
농성 해산 후 국제상사 측은 이경희, 김영숙, 송후분, 이경애, 김명선, 이순희, 이상월, 정미영, 최춘식, 윤태, 김미자 등 농성 주동자 11명을 강제로 해고하였다. 또한 이에 불복하여 출근 투쟁하는 노동자를 폭행하는 등 지속적인 탄압을 자행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해고 노동자를 중심으로 국제상사 민주노조건설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유인물을 통한 선전 활동을 계속하였다.
1988년 회사 내 경비 폭력 문제를 고발하고, 1990년 강제적인 조기 출근을 거부하는 투쟁을 전개하였으며, 1991년 노조 위원장 직선제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1991년 선거에서 민주적인 대의원 8명을 당선시키고, 비록 간선제로 치렀지만 민주 진영에서 부위원장 1명을 당선시키는 성과를 내며 민주 노조의 발판을 만들어 냈다.
[의의와 평가]
7월 28일부터 16일 동안 진행된 국제상사 노동자 투쟁은 1987년 노동자 대투쟁 가운데 가장 장기적인 투쟁이었다. 또한 이 과정은 부산 지역 노동계의 연대 집회, 지역 주민의 동참, 민주 세력의 지원과 같은 지역 사회의 지지 속에서 진행되었다는 점에 큰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