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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 철폐 요구 유인물 배포 사건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5123
한자 戒嚴撤廢要求油印物配布事件
영어의미역 Distribution of Printed Materials Calling for Abolition of Martial Law
분야 역사/근현대,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부산광역시 중구 광복동|남포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종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민주화 운동
관련인물/단체 노재열|김영
발생|시작 시기/일시 1980년 5월 19일연표보기 - 유인물 살포
종결 시기/일시 1980년 9월연표보기 - 계엄고등군사법원에서 형 확정
발단 시기/일시 1980년 5월 18일 - 유인물 제작
전개 시기/일시 1980년 5월 19일 - 김영 체포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80년 9월 - 노재열 체포
발생|시작 장소 미화당 백화점 앞 - 부산광역시 중구 광복동지도보기
발생|시작 장소 부영 극장 앞, 구둣방 골목 - 부산광역시 중구 남포동
종결 장소 계엄 고등 군사 법원 - 서울특별시

[정의]

1980년 부산에서 계엄 철폐를 요구하는 유인물이 배포된 사건.

[역사적 배경]

1980년 5월 17일 24시를 기해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이른바 ‘신군부’ 세력이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으로 계엄을 확대 실시함으로써 국가 권력을 장악하려는 의도를 노골화하였다. 이에 전국의 각 대학에는 휴교령이 내려져 학생들의 교내 출입이 차단되고, 대학가는 물론 시내 중심가에도 총을 든 계엄군과 사복형사들이 삼엄한 경계를 하였다.

[경과]

1980년 5월 18일 저녁 부산대학교 공과 대학 4학년 노재열은 부산광역시 동래구 장전동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후배인 부산대학교 철학과 3학년 김영[필명 김하기], 배정열과 같이 문성야학에서 가져온 등사기로 「부산대학교 성전 포고문에 즈음하여」라는 제하의 유인물 약 1,000장을 인쇄하였다.

유인물의 내용은 “당국은 5·18 반동 조치로서 계엄 확대 강화 및 민주 인사 구속 등 실로 목불인견적 탄압을 가하는 바” “현 정권 음모와 반민주적 태도는 조국의 통일과 민주화를 열망하는 우리 부대인에게 촌보라도 양보될 수 없다” “전두환이 정권을 잡으려 유신 망령이 해골을 굴리며 나오려 하는 이 때” “청년 학도들이여 일어서라”, “계엄 철폐하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유인물을 살포함으로써, 시민들의 항쟁을 선동하고자 했던 것이다.

다음날인 5월 19일 하오 7시 30분 노재열, 김영, 배정열 등은 각각 광복동의 미화당 백화점 3층, 남포동부영 극장 옆 빌딩 8층, 남포동 구둣방 골목 2층 가게 등에서 건물 바깥으로 준비한 유인물 「부산대학교 성전 포고문에 즈음하여」를 성공적으로 살포한 후, 약속한 집결지인 부산 미국문화원 앞으로 향했다. 하지만 삼엄한 경계망을 이룬 계엄군과 경찰에 의해 살포된 유인물은 거의 현장에서 회수되었고, 계획한 가두시위는 성공하지 못했다.

[결과]

주모자 가운데 김영은 남경희[부산대학교 3학년]와 한 조를 이루어 유인물을 배포한 후 내려오다 빌딩 1층에서 현장 체포되었다. 노재열과 배정열은 현장의 체포를 피하고 집결지에 모였다가 피신하였지만, 결국 노재열은 수배되었다가 1980년 9월 체포되었다. 이들은 재판에 회부되어 계엄 고등군사법원에서 노재열은 징역 10월을 선고받았고, 김영은 선고 유예를 받은 후 군대에 징집되었으며, 배정열은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의의와 평가]

계엄 철폐 요구 유인물 배포 사건은 전두환 등 신군부가 5·17 계엄 확대를 선포한 직후에 그에 대응한 항거로서, 부산 지역에서는 최초의 5·18 민주화 투쟁으로 평가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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