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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5022
한자 五月抗爭
영어의미역 May Uprising
분야 역사/근현대,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정승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민주화 운동
관련인물/단체 강경대|박창수|범국민대책회의|부산시국회의
발생|시작 시기/일시 1991년 4월 27일연표보기 - ‘범국민대책회의’ 결성
종결 시기/일시 1991년 6월 1일연표보기 -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발대식
발단 시기/일시 1991년 4월 26일 - 강경대 사망
전개 시기/일시 1991년 5월 1일 - 수만 명 시민 가두시위
전개 시기/일시 1991년 5월 4일 - 3만 명 집회, 가두시위
전개 시기/일시 1991년 5월 6일 - 박창수 의문사
전개 시기/일시 1991년 5월 14일연표보기 - ‘고 강경대 열사 추모 국민대회’ 개최
전개 시기/일시 1991년 5월 14일 - 부산울산지역총학생회협의회 가톨릭센터 단식 농성
전개 시기/일시 1991년 5월 25일연표보기 - ‘박창수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사망 규탄 대회’ 개최
발생|시작 장소 부산광역시
종결 장소 부산대학교 - 부산광역시 금정구 장전동 산30지도보기

[정의]

1991년 노태우(盧泰愚) 정권의 비리와 공안 통치의 규탄 과정에서 발생한 강경대(姜慶大), 박창수(朴昌洙) 사망 사건에 대한 범국민적인 저항.

[역사적 배경]

1991년 초 ‘수서 택지 특혜 분양 사건’을 포함한 권력형 비리, 두산전자가 낙동강에 페놀을 방류한 사건 등이 터지면서 노태우 정권의 공안 통치와 민생 파탄에 대한 분노가 뒤섞여 전국적으로 반정부 시위가 전개되었다. 이런 가운데 4월 26일 명지대학교 학생 강경대가 교내 집회에서 백골단의 쇠파이프에 맞아 사망하자, 국민적 분노와 충격 속에서 시민과 학생 11명의 항의 분신이 이어졌다.

한편으로 ‘민자당 일당 독재 음모 분쇄 및 민중기본권 쟁취 국민연합 부산본부’[약칭 ‘국민연합 부산본부’]와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약칭 전대협] 및 종교계와 학계는 4월 27일 ‘고 강경대 열사 폭력 살인 규탄과 공안 통치 종식을 위한 범국민대책회의’[약칭 ‘범국민대책회의’]를 구성하고 4월 29일부터 본격적인 투쟁에 돌입하였다.

[경과]

부산에서는 5월 1일 고 강경대 열사 폭력 살인 규탄과 공안 통치 종식을 위한 범국민대책회의의 주도로 수만 명이 참여하는 가두시위가 시내 곳곳에서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고 강경대 열사 폭력 살인 규탄과 공안 통치 종식을 위한 범국민대책회의’가 ‘백골단 해체의 날’로 지정한 5월 4일 부산에서는 경찰이 부산역을 원천 봉쇄하자 역 앞의 8차선 도로를 완전히 점거하고 연좌시위를 벌인 후 강경대의 영정을 앞세우고 서면까지 평화 가두 행진에 들어갔다. 서면 태화 쇼핑 앞에 모인 3만여 명의 시민 학생들은 노태우 정권 퇴진의 결의를 다지는 집회를 가졌다.

5월 6일에는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어 있던 한진중공업 박창수 노조 위원장이 안양병원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시신마저 경찰에 탈취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부산 지역의 노동계와 재야가 발칵 뒤집혔으며, 이런 사건을 거치면서 부산에서는 1987년 6월 민주 항쟁에 비견될 정도의 광범하고 격렬한 대중 투쟁이 상당 기간 지속되었다.

5월 14일 부산역에서는 ‘민자당 일당 독재 음모 분쇄 및 민중기본권 쟁취 국민연합 부산본부’와 야당으로 구성된 ‘부산시국회의’가 주최한 ‘고 강경대 열사 추모 국민 대회’에 2만여 명이 참여하였다. 집회를 마친 후 서면까지 평화 행진을 한 참가자 가운데 2~3,000여 명의 시민 학생들은 서면 로터리에 있는 김정수 민자당 의원 사무실에 화염병을 투척하여 건물 내부를 전소시키는 등 경찰과 격렬한 공방전을 새벽 6시까지 전개하였다. 이 과정에서 500여 명의 택시 기사들이 ‘경적 시위’를 통해 ‘노태우 정권 퇴진’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이날 부산울산지역총학생회협의회[약칭 부울총협] 소속 학생 21명은 부산 가톨릭 센터 2층 강당에서 ‘노정권 퇴진 및 공안 정국 종식을 위한 무기한 단식 농성’에 들어갔다. ‘박창수 열사 옥중 살인 진상 규명을 위한 부산노동자대책회의’와 부산울산지역총학생회협의회 소속 학생 등 5,000여 명은 5월 25일 부산상업고등학교[현 개성고등학교]에서 열기로 한 ‘박창수 한진중공업 노조 위원장 사망 규탄 대회’가 경찰의 원천 봉쇄로 무산되자, 서면 태화쇼핑부전동 시장·병무청 앞·전포동 한일 레포츠 앞 등에서 최루탄을 난사하는 경찰에 맞서 격렬한 공방전을 벌였다.

6월 1일에는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 5만여 명의 학생들이 참여한 가운데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발대식이 부산대학교 운동장에서 개최되었다. 한편 노동 현장에서는 23개 사업장에서 파업 투쟁에 돌입하여 민주 노조 운동을 전개하고 이를 통한 부산지역노동조합총연합[약칭 부산노련]을 지켜내는 데 큰 성과를 보았다. 특히 정부와 사용자측의 계속된 탄압과 회유에 맞서 비타협적 투쟁을 전개한 대우정밀 노조와 박창수의 의문사를 계기로 전국적 투쟁의 중심으로 떠오른 한진중공업 노조는 이 시기 노동 운동의 모범으로 평가된다.

[결과]

5월 항쟁의 열기에도 불구하고 부산 지역의 진보 세력은 6월에 실시된 지방자치제 선거에서 참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5월 항쟁을 진행하는 과정인 1991년 5월 28일 부산에서는 ‘참여와 자치를 위한 시민연대회의’가 출범하였다. 이는 부산참여자치시민연대로 발전하면서 현재 부산을 대표하는 풀뿌리 시민단체로 성장하였다.

[의의와 평가]

5월 항쟁은 부산 지역의 학생 운동이 조직력을 강화하고, 민주 노조 운동이 대중적 토대를 넓히는 데 기여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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