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41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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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朱基徹 |
영어음역 | Ju Gicheol |
분야 | 종교/기독교,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종교인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이광욱 |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 지역에서 사목하고, 신사 참배를 거부하여 옥사한 개신교 지도자.
[개설]
아버지는 주현성이고, 어머니는 조재선이다. 주현성은 경남노회 소속 웅천 북부리교회의 장로였다.
[활동 사항]
주기철(朱基徹)[1897~1944]은 1897년 경상남도 창원군 웅천면[현 경상남도 창원시]에서 태어났다. 웅천(熊川)은 조선 초기 내이포(乃而浦) 또는 제포(薺浦)로 불렸으며 일본 세견선에 의해 문호가 개방되었던 곳이었다. 주기철은 1906년 고향의 개통학교에 입학하여 초등 교육을 받았고, 1913년 정주 오산학교에 진학하였다. 오산학교는 남강(南岡) 이승훈(李昇薰)이 세운 민족의식이 강한 학교였으며, 주기철은 이곳에서 고당(古堂) 조만식(曺晩植)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다. 오산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서울의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 상과로 진학하였으나 1916년에 자퇴하여 고향으로 내려왔다.
1917년에는 이기선(李基宣) 목사의 중매로 김해교회 출신으로 신교육을 받은 안갑수와 결혼하였다. 1919년 3·1 운동 때에는 지방 만세 운동의 행동책으로 활동하다 1개월의 구류를 살기도 하였다. 이후 1920년 두 차례에 걸친 김익두(金益斗) 목사의 사경회에 참석하고 나서 목회자로서의 생활을 결심하였다. 1921년 경남노회에서 목사 후보생 시취에 합격한 뒤, 1922년 3월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신학교를 다니는 동안 경상남도 양산읍교회의 전도사로 일하면서 목회자로서의 첫걸음을 내디뎠다.
1925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목사 안수를 받은 주기철은 1926년부터 1931년 7월까지 초량교회 담임 목사로 일하였다. 초량교회가 있는 초량 지역 인근은 일본인 거주지와 지리적으로 가까웠으며 개항 이후 왜관이 설치되고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상인들이 많이 왕래하였다. 이런 까닭에 초량교회의 교인들 가운데 상당수는 상업에 종사하는 상인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들 가운데 독립운동의 자금 조달을 담당하였던 백산상회를 설립한 백산(白山) 안희제(安熙濟)와 윤현진(尹顯振) 등이 초량교회의 교인으로 출석하였다는 것은 당시의 초량교회가 신앙 활동의 중심지이면서 동시에 민족주의적인 경향이 있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1925년부터 6년 동안 초량교회의 부흥을 위해 힘쓴 주기철은 1931년 여름부터 1936년까지 마산교회[문창교회] 담임 목사로 봉사하였다. 이 시기에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주기철의 주요 행적은 1929년 혹은 1931년의 경남노회에서 신사 참배반대 결의를 주도하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사람의 증언을 통해서만 주장되었을 뿐 경남노회의 기록을 통해서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1930년대 후반 일본 제국주의는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을 통해 제국을 더욱 확장하려고 하였으며, 조선과 대만 등의 식민지를 황민화 정책과 군국주의 노선을 통하여 지배하려고 하였다. 이런 와중에 일본 제국주의는 한국 교회에 신앙의 자유를 침해하는 신사 참배를 강요하게 되었고, 이런 시대적 흐름 속에서 1936년 7월 평양의 산정현교회 담임 목사로 부임한 주기철은 일본의 신사 참배 정책에 지속적으로 저항하였다. 1938년 2월의 1차 검속을 시작으로, 1938년 8월과 1939년 9월, 그리고 1940년 6월에 이르기까지 4차례에 걸쳐 검속, 투옥되어 옥고를 치른 주기철은 1944년 4월 21일 감옥에서 4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상훈과 추모]
1963년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