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40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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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趙泰東 |
영어음역 | Jo Taedong |
이칭/별칭 | 성등(聖登)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부산광역시 동래구 명륜로112번길 61[수안동 421-56]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한문종 |
[정의]
조선 후기 동래 부사를 지낸 문신.
[가계]
본관은 양주(楊洲). 자는 성등(聖登). 증조 할아버지는 호조 판서 조존성(趙存性)이고, 할아버지는 형조 판서 조계원(趙啓遠)이며, 아버지는 전라 감사 조구석(趙龜錫)이다. 어머니는 밀산군(密山君) 이찬(李燦)의 딸이다. 사촌동생은 노론 4대신 중 한 명으로 판중추부사를 지낸 조태채(趙泰采)이다.
[활동 사항]
조태동(趙泰東)[1649~1712]은 1683년 진사시, 생원시를 거쳐 1695년(숙종 21)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696년(숙종 22)부터 사헌부 지평, 세자시강원 사서, 사간원 정언, 홍문관 수찬, 교리를 지내고 1698년(숙종 24) 9월 동래 부사로 부임하였다. 동래 부사 재임 시 재판왜(裁判倭)가 와서 공미(公米)[왜와의 무역 대금으로 지불한 쌀]를 요청한 문제로 장계를 올렸다. 재판왜는 “공미를 주지 않으려면 대신 관소(館所)에 있는 공목[무명] 9새[升]를 달라”고 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왜인들은 걸핏하면 조선 조정의 명은 어기면서 자신들의 요구를 들어 달라고만 한다. 그러니 알아듣게 잘 타일러서 규정을 지키면 그때 약속된 공목을 지급하겠다고 전하라”는 답서가 내려왔다.
조태동은 1699년 4월 병으로 동래 부사직을 그만두고 이후 홍문관 응교, 승지를 거쳐 1700년(숙종 26) 충청도 관찰사로 나갔다. 1702년(숙종 28) 10월에 경상 관찰사로 부임하고 한 달 뒤 ‘동래는 바다를 지키는 중요한 지역이고, 해적이 침입하는 첫 길목인데도 작은 성조차 없어 방비가 매우 허술하다’고 지적하고 금정산성(金井山城)을 쌓을 것을 건의하여 성사시켰다. 1703년(숙종 29) 병조 참지가 되었으며 동지사(冬至使) 서종태(徐宗泰)의 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승지, 대사간, 이조 참의, 성균관 대사성 등을 역임하고 1709년(숙종 35) 함경도 관찰사로 나갔다. 이듬해 다시 대사간, 대사헌이 되었으며, 1711년 형조 참판으로서 참핵사(參覈使)가 되어 청나라와의 외교 문제를 처리하였다. 윤증(尹拯)의 문인으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