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40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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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趙存性 |
영어음역 | Jo Jonseong |
이칭/별칭 | 수초(守初),용호(龍湖),정곡(鼎谷),소민(昭敏)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부산광역시 동래구 명륜로112번길 61[수안동 421-56]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구지현 |
[정의]
조선 후기 동래 부사를 지낸 문신.
[가계]
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수초(守初), 호는 용호(龍湖)·정곡(鼎谷). 아버지는 이조 참판에 추증된 조연손(趙連孫)이고, 아버지는 이조 판서에 추증된 조람(趙擥)이며, 친아버지는 용인 현령 조준수(趙俊秀)이다. 아들은 형조 판서 조계원(趙啓遠)이다.
[활동 사항]
조존성(趙存性)[1554~1628]은 1590년(선조 23)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과 봉교, 사간원 정언, 예문관 대교를 역임하였다. 정철(鄭澈)의 일당으로 몰려 탄핵되었으나,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대교로 복직 후 성균관 전적으로 승진하였다. 1593년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명군의 조선 철수 논의를 중단시키고, 화약 연료인 초황 수만 근을 들여오는 공을 세웠다.
1597년(선조 30) 해운판관으로서 군량미 운반을 담당하였다. 강화 부사, 호남 어사, 양주와 충주의 목사, 서산 군수 등을 역임하고 1610년(광해군 2) 동래 부사가 되었다. 『동래부지(東萊府誌)』에 따르면, 조존성은 1610년 9월 동래에 부임하여 동래 향교의 대성전을 중수하고, 1611년 11월 사직하였다고 한다. 1613년(광해군 5) 광해군(光海君)의 생모인 공빈 김씨(恭嬪金氏)의 추존을 반대하다가 파직되었으며, 1623년 인조반정 후 복관되어 형조와 호조의 참판, 오위 부총관을 역임하였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호조 판서로서 소현 세자(昭顯世子)를 모시고 전주로 피난하였다가 서울로 돌아와 병들어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저술]
성혼(成渾)과 박지화(朴枝華) 문하에서 공부하였고, 『해동가요(海東歌謠)』에 시조 4수가 전한다.
[묘소]
조존성의 묘는 경기도 남양주시 수석동에 있다.
[상훈과 추모]
1630년(인조 8) 소민(昭敏) 시호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