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40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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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亨復 |
영어음역 | Jeong Hyeongbok |
이칭/별칭 | 양래(陽來)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부산광역시 동래구 명륜로112번길 61[수안동 421-56]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구지현 |
[정의]
조선 후기 동래 부사를 지낸 문신.
[가계]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양래(陽來). 아버지는 정제선(鄭濟先)이다.
[활동 사항]
정형복(鄭亨復)[1686~1769]은 1725년(영조 1) 문과에 급제하여 세자시강원 설서, 홍문관 응교, 사헌부 지평, 사간원 정언, 병조 정랑, 홍문관 수찬, 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1732년(영조 8) 전라도 암행어사로 파견되었고, 1734년 전라도 경차관(敬差官)에 임명되어 민정을 살폈다. 『동래부지(東萊府誌)』에 의하면 정형복은 1738년(영조 14) 7월 교리로 있을 때 동래 부사에 임명되었고 9월에 부임하였다. 경상 좌병사 우하형(禹夏亨)이 별기위(別騎衛)의 활쏘기 시험을 치르려 하였으나 정형복은 농사에 방해가 된다는 핑계로 차일피일 미루면서 허락하지 않았다. 우하형이 이 일을 조정에 아뢰자, 조정에서는 군율이 느슨하다는 이유로 우하형을 파직시키고, 정형복도 불러 조사한 다음 1739년 5월 파직시켰다.
1740년(영조 16) 승지를 거쳐 사간원 대사간이 되었다. 이후 강원도 관찰사, 성균관 대사성, 전라도 관찰사를 지냈다. 1747년(영조23년) 청백리에 녹선(錄選)되어 가선대부(嘉善大夫)로 가자(加資)되었다. 1748년(영조 24)에는 동지사 겸 사은사(冬至使兼謝恩使)의 부사로 청나라 연경(燕京)에 다녀왔고, 1750년(영조 26) 황해도 관찰사, 1755년(영조 31) 형조 판서, 1759년(영조 35) 호조 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영조실록(英祖實錄)』에 따르면, 정형복은 겉으로는 온화하나 속은 매우 강직하였고 검소하게 살았다고 한다. 1769년(영조 45) 정형복이 죽자 영조(英祖)가 매우 슬퍼하여 제문을 지어 보내고, 정형복의 아들에게 특별히 벼슬을 주라고 명하였다.
[묘소]
정형복의 묘는 경기도 고양시 일산구 장항동에 있다.
[상훈과 추모]
1796년(정조 20) 청백리로 선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