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4087
한자 鄭尙愚
영어음역 Jeong Sangu
이칭/별칭 중급(仲及)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부산광역시 동래구 명륜로112번길 61[수안동 421-56]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동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온양(溫陽)
대표관직 동래 부사|이조 참의
출생 시기/일시 1756년연표보기 - 출생
활동 시기/일시 1790년 - 증광시 문과 갑과 2위에 급제
활동 시기/일시 1796년 12월 - 동래 부사 제수
활동 시기/일시 1798년 5월연표보기 - 동래 부사 사임
활동 시기/일시 1799년 1월 - 이조 참의 제수
부임|활동지 동래부 - 부산광역시 동래구 명륜로 112번길 61[수안동 421-56]지도보기

[정의]

조선 후기 동래 부사를 지낸 문신.

[가계]

본관은 온양(溫陽). 자는 중급(仲及). 증조할아버지는 정광겸(鄭光謙)이고, 할아버지는 정창유(鄭昌兪)이다. 아버지는 정원시(鄭元始)이며, 어머니는 윤원동(尹遠東)의 딸이다. 부인은 송지경(宋持敬)의 딸이다.

[활동 사항]

정상우(鄭尙愚)는 1756년(영조 32)에 태어났다. 1790년(정조 14) 증광시 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1793년(정조 17) 서장관으로 청에 다녀와 청의 극심한 흉년, 황실의 사정, 각노(閣老) 화곤(和困)의 막강한 권세 등에 대해 보고하였다. 1796년(정조 20) 12월부터 1798년(정조 22) 5월 어버이의 병 때문에 사임을 요청하여 교체될 때까지 동래 부사를 역임하였다.

『정조실록(正祖實錄)』 21년[1797] 9월 6일조에 서양 선박이 동래 용당포 앞바다에 표류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당시 동래 부사 정상우는 “용당포에 달려가서 표류해 온 사람을 보았더니, 코는 높고 눈은 푸른 것이 서양 사람인 듯하였다. 또 그 배에 실은 물건을 보니 곧 유리병·천리경(千里鏡)[망원경]·무공은전(無孔銀錢)으로 모두 서양 물산이었다. 언어와 말소리는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고, 오직 ‘낭가사기(浪加沙其)’라는 네 글자가 나왔는데, 이는 바로 왜어(倭語)로 장기도(長崎島)이니, 아마도 상선이 장기도부터 표류하여 이곳에 도착한 것 같다. 우리나라 사람을 대하여 손으로 대마도 근처를 가리키면서 입으로 바람을 내고 있는데, 이는 순풍을 기다리는 뜻인 듯하다”라고 보고하였다.

용당포에 표류한 서양 선박은 윌리엄 로버트 브라우튼(William Robert Broughton)함장이 지휘하는 영국 해군 탐사선 프로비던스(Providence)호다. 프로비던스호는 1797년 10월 13일[음 8월 24일] 일몰 후에 부산 부근에 도착하여 이튿날 새벽에 처음 조선 사람을 대면하고 부산항을 탐사 조사한 후 10월 21일[음 9월 2일] 부산을 떠났다. 영국 선박으로는 처음 부산에 정박한 것이다.

브라우튼 함장이 쓴 항해 일지는 보면 조선을 초산(Chosan) 또는 토산(Thosan)이라 적었고, 직접 작성한 항박도에 초산 하버(Chosan Harbour)라고 표기하였다. 말이 통하지 않는 상황에서 One을 Hannah[하나], Hair를 Murree[머리], Water를 Mool[물], Man을 Sanna[사내], Woman을 Kageep[계집] 등으로 적었다. 현지 주민의 생활과 풍습까지 적혀 있어 주목된다. 브라우튼 함장은 호의 표시로 출항 직전 조선 측에 권총과 망원경을 답례품으로 내놓았다.

1804년(순조 4) 런던에서 출간된 브라우튼 함장의 항해 일기는 부산항을 서양에 처음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부산광역시 남구청에서는 이때의 영국과 조선[부산]의 만남을 기념하는 비석을 2001년 4월 남구 신선대에 세웠다.

『정조실록』 22년[1798] 7월 7일조에 정상우는 전임 동래 부사로서 동래 지역의 전복 진상의 폐단에 대하여 “동래에서 진상하는 전복은 예전부터 토산물을 따서 바쳤습니다. 그런데 연전에 마침 감영에서 퇴짜를 놓는 바람에 다른 고을에서 사다가 바쳤는데, 그것이 그냥 관례로 굳어지고 말았습니다. 그 뒤로 왕래하며 무역하는 즈음에 발생하는 민폐가 적지 않습니다”라고 하여 이를 개선하도록 건의하였다. 이에 정조는 비변사로 하여금 경상 감사에게 엄격하게 지시하여 동래부부터 바로잡은 후 다른 고을의 유사한 폐단도 바로잡도록 지시하였다. 1799년 1월 이조 참의를 제수하였고, 몰년은 알 수 없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