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40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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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成夏衍 |
영어음역 | Seong Hayeon |
이칭/별칭 | 공회(孔懷)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부산광역시 동래구 명륜로112번길 61[수안동 421-56]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구지현 |
[정의]
조선 후기 동래 부사를 지낸 문신.
[가계]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공회(孔懷). 아버지는 동래 부사 및 경상 관찰사를 지낸 성진선(成晉善)[1557~?]이다.
[활동 사항]
성하연(成夏衍)[1585~?]은 1613년(광해군 5) 대북파(大北派)가 선조의 적자인 영창 대군(永昌大君)과 그 추종 세력인 소북파(小北派)를 제거한 사건인 계축옥사(癸丑獄事) 후 성균관 유생 이위경(李偉卿)[1586~1623]이 중심이 되어 영창 대군의 어머니인 인목 대비(仁穆大妃)를 폐하자는 상소를 올릴 때 동참하였다. 1618년(광해군 10) 문과에 급제하고, 이듬해 사헌부 지평과 사간원 헌납을 지냈으며 1622년(광해군 14) 동래 부사로 부임하였다.
『동래부지(東萊府誌)』에는 성하연이 1622년 8월 동래 부사로 부임하였다가 이듬해 1월 상을 당하여 그만둔 것으로 되어 있다.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에 따르면, 성하연은 폐모론 상소에 동참한 공으로 품계를 뛰어넘어 동래 부사에 임명되었다. 부임 후 동래의 소통사(小通詞)들과 결탁하여 왜와의 무역으로 발생한 이익을 사적으로 챙겨 왜인들도 성하연을 더럽게 여겼다고 한다. 1623년 인조반정 직후에 과거 폐모론을 주장했던 죄로 위리안치(圍籬安置)[죄인을 가시울타리 안에 가둠]되었다가 1633년(인조 11) 풀려났다.